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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정 칼럼] 외교로 망했던 나라의 외교 행태, 힘없던 시절 미화로 국뽕 향수에 젖어, 대한민국에서 조선으로의 회귀

시사窓/정치

by dobioi 2021. 2. 24.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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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은 가슴 아픈 과거의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다. 그 어떤 나라나 평이하고 무난한 나라가 없듯 말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딴나라의 상황과 다른 부분, 독특한 부분이 자주 보인다. 한국스럽다 할 수 있는 좋은 부분도 존재하지만, 어쩔 땐 무기력하거나, 내분으로 정의로움과는 좀 동떨어진 상황에 놓이거나, 승자 패자가 바뀌거나, 가해자 피해자가 바뀌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곤 했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어느 정도 정통한 가감없는 역사라 친다면 좀 부끄러운 부분이 많다.

최근도 마찬가지다. 잘했을 때는 자신이 잘한 거고, 못했을 때는 남이 못한 거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조장하는 것은 예사에다가, 역사를 바로 세우고 싶다면서 더 왜곡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뭔가 거꾸로인 것 같고, 앞서 말한 가피가 바뀌거나 승패가 바뀌어,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하는지 뻔히 드러나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역시 가감없는 역사는 없는 것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내편의 공적은 공적이고, 나와는 조금이라도 다른 편이면 그 공적은 비리로 전락해버린다. 내편이 성범죄를 지어도 잘한 짓이 되는 거고, 남편은 조그만 티끌같은 잘못도 침소봉대해서 난리법석을 피운다. 다 그런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가슴 아픈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과거의 역사로 현재를 조명해보는 것은 참 유익한 것이다. 그것으로 교훈을 삼을 수 있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이렇게라도 전세계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애썾주신 조상님들과 선조들, 선배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선배들을 조져서 더 잘할 수 있음 좋겠으나, 조지기만 하고, 분탕질을 쳐놓는 상황을 보고 있자니... 하많하않이다.

 

이겨내고, 끝내 승리하기를 기원한다.

 

 

www.chosun.com/opinion/column/2021/02/24/RFWCU5NU45FBNKMDWWKEXLIGGI/

 

[선우정 칼럼] 외교로 망했던 나라의 외교 행태

아베 정권의 한국 정책엔 역설적인 부분이 있었다. 집권 8년 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던 한국에 외무성 엘리트를 집중 배치했다는 점이다. 개인적 경험에선 친한(親韓)·혐한(嫌韓)을 떠나 자국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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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정 칼럼] 외교로 망했던 나라의 외교 행태

선우정 부국장

 

 

19세 때 오키치의 모습으로 알려진 사진. 19세기 중반 일본 여성을 기준으로 상당한 미인이라 이 사진은 '오키치 붐'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진위가 불명확함에도 오키치 사진으로 유통되는 것은 이 여인을 근대의 추억으로 남기고자 하는 일본 사회의 의지가 반영돼 있다.

일본 이즈반도의 항구 도시 시모다(下田)에서 인상 깊게 본 것은 한 기녀의 기념관이다. 시모다는 일본을 개국시킨 미국 페리 제독의 상륙 장소이자 주일 미국 공관의 첫 개설지로 유명해 개국과 근대를 추억하는 시설이 많다. 기녀 ‘오키치’의 기념관도 그중 하나다. 오키치에 대한 공식 기록은 초대 미국 공사를 사흘 동안 모셨다는 것이 전부다. 여기에 수많은 이야기를 더해 오키치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비극의 여성으로 극화됐다. 일본이 세계와의 첫 만남을 얼마나 추억하고 싶어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에서 정한론(征韓論) 파동이 일어난 것은 1873년이다. 한국사 교과서는 일본이 이때 목표를 한국 병탄까지 무력을 통해 일직선으로 밀고 간 것처럼 서술한다. 결과는 맞지만 내용은 다르다. 정한론 파동은 내전까지 거치면서 사무라이 구세력의 퇴장과 외교를 중시하는 신세력의 대두로 귀결됐다. 일본의 국제화에 강력한 동력을 제공한 사건이다. 한국의 서술은 일본의 신세력이 이후 거대한 국제 외교 무대에서 어떤 수법으로 한국을 삶아먹었는지 알려주지 못한다.

러일전쟁 초기 프랑스 신문 ‘르 프티 파리지앵’에 실린 유명한 만평이 있다. 왜소한 일본인과 덩치가 3배쯤 되는 러시아인이 링에서 붙고 있다. 링 바닥엔 동북아시아 지도가 그려져 있다. 러시아인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 일본 선수는 한반도 남부를 밟고 있다. 관중석 앞줄에는 덩치가 큰 영국인이, 다음 줄엔 프랑스와 독일인이 앉아 있다. 그다음 줄에 미국인이 서 있다. 경기장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장막 뒤에서 훔쳐보는 중국인이 처량하다.

러일전쟁 초기 프랑스 신문 ‘르 프티 파리지앵’에 실린 유명한 만평. 당시 국제 정세와 관련한 풍자화가 유명했는데, 한국은 이처럼 밟히는 존재로 묘사됐다. 닭장 속의 닭, 갓을 쓴 소경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영국, 러시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영국은 여러 수법으로 러시아 함대의 전력을 고갈시켰다. 몰래 약을 먹여 선수를 녹초로 만든 뒤 링에 올린 것과 같다. 프랑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프랑스 참전 가능성이 있었다면 일본은 전쟁을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한반도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프랑스는 왜 그랬을까. 같은 시기 프랑스는 모로코를 두고 독일과 충돌했다. 영국의 지지가 필요했다. 이를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는 1904년 적대 관계를 청산하는 이른바 ‘앙당트(협상)’ 체제를 만들었다. 영국의 동맹국에 칼을 겨눌 수 없었다.

일본이 영국과 동맹을 맺은 것은 1902년이다. 실권자 이노우에 가오루는 “횡재”라고 했다. 하지만 일본엔 지구 반대편 나비의 날갯짓을 예민하게 읽어낸 탁월한 외교관들이 있었다. 국제 외교의 역학 변화를 귀신같이 낚아채 재빨리 반응했다. 영일 동맹으로 러시아를 고립시킨 뒤 전쟁에 돌입했다. 일본 해군은 한국 진해 기지에서 러시아를 기다렸다. 작가 시바 료타로의 책 ‘가도를 간다’엔 이순신 진혼제를 연 일본 해군의 모습이 나온다. 출전하는 군인들이 이순신에 향해 예를 올렸다는 기록도 있다. 과거의 적장에게 예를 갖춤으로써 승전을 기원했다. 정한론 파동도, 모로코 위기도 모른 한국은 이순신의 가치조차 일본보다 몰랐던 것이다.

 

외교사로 보면 한국은 1907년 헤이그 회담까지 실낱같은 숨을 쉬고 있었다. 한국사 교과서는 헤이그 사건을 고종의 반일 저항과 독립 외교의 출발점으로 본다. 이준 열사의 비상한 자결 신화로도 전승된다. 헤이그 특사는 러시아의 공식 초청에 따른 것이다. 러시아는 한국 독립을 의제로 올려 일본을 압박하려고 했다. 이 시도가 성공했다면 명목상이나마 한국 국호는 얼마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한국 카드를 중도에 접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다시 전쟁을 일으킬 여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나비효과를 갖다 붙이면 ‘피의 일요일’에 뿌려진 러시아 인민의 피가 한국의 운명을 결정했다. 한국은 철회 사실도 몰랐다. 러시아는 영국과 앙당트 체제를 구축하고 일본과는 만주 이권을 분할하는 협약을 맺었다. 영국과 러시아가 벌인 ‘그레이트 게임’이 영·불·러·일의 4국 협상 체제로 결판났다. 한국 편이 사라졌다. 한국은 외교로 망한 것이다.

지금 동북아 링 위에는 중국 선수와 일본 선수가 마주하고 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의 시선으로 보면 ‘전제정치’ 대 ‘민주주의 동맹’의 대결이다. 맨 앞줄에 미국인이, 그 뒤엔 호주와 인도인이 앉았다. 영국인이 문을 열고 들어오려 한다. 한국은 어디에 있을까? 한국만의 링에서 삼류 일본인을 데려다 ‘반일(反日)’ 주먹을 날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건 그렇다고 치자. 중요한 것은 미중이 벌이는 ‘그레이트 게임’에 일본이 들어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은 일본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를 뿐만 아니라 알 가치도 못 느낀다는 것이다.

아베 정권의 한국 정책엔 역설적인 부분이 있었다. 집권 8년 내내 사이가 좋지 않았던 한국에 외무성 엘리트를 집중 배치했다는 점이다. 친한·혐한을 떠나 자국 이익을 중시하는 유능한 외교관이란 느낌을 받았다. 주미 일본대사를 비롯해 이들이 세계 주요국으로 퍼져 무언가 새로운 외교의 틀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궁금하기도 하고 약간 두렵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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