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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훅!뉴스]5·18 계엄군, 기자에게 전한 41년 만의 고백 과격하게 했지…특전사인데 밀릴 줄은 생각도 못해 지나는 차량 기름탱크에 총격, 이후 어찌됐는지는 몰라 최후작전 때 직감

시사窓/정치

by dobioi 2021. 5. 17.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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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많은 역사를 가진 나라다. 그 과거가 자양분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피해자 분들에게는 몹쓸 말일 수 있어 조심스럽다.

가해자를 보호하는 나라에서 피해자로 살아가는 것은 고역일 것이라 생각한다. 떵떵 거리고 살아가고 있는 가해자와 숨죽이며 아무 말도 못하며 살아가는 피해자와의 간극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 화해는 고사하고, 잘못을 시인이라도 하면 좋을텐데, 아마도 그러지 못하고 세기가 끝나지 않을까 싶다.

 

정권도 바뀌고, 또 뒤바뀌어도 해결되지는 못하고, 그저 더 힘들어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남지 않을까 싶다.

 

쉽지않은 역사다. 그리고 그 역사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야 하고, 과거는 정리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죽으면 끝나고, 잊혀지고, 사라지는 것이 역사이겠으나, 어떤 것이 더 좋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http://cbs.kr/sFQenD

 

5·18 계엄군, 기자에게 전한 '41년 만의 고백'

"정조준하고 다다닥…한동안 참 마음이 많이 아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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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훅!뉴스]5·18 계엄군, 기자에게 전한 '41년 만의 고백'

"과격하게 했지…특전사인데 밀릴 줄은 생각도 못해"
"지나는 차량 기름탱크에 총격, 이후 어찌됐는지는 몰라"
"정조준하고 다다닥…한동안 참 마음이 많이 아팠죠"
"최후작전 때 직감…이 한과 아픔이 한 세기 간다고 풀릴까"
"동료끼리도 '전두환이 사과하고 무릎꿇고 빌어야 한다'고"

 

■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2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김정훈 (CBS 심층취재팀 기자)

◇ 김현정> 뉴스 속으로 훅 파고 드는 시간입니다. 훅뉴스 CBS 심층취재팀 김정훈 기자 나와 있습니다. 어서 오세요, 김 기자. 오늘이 5월 17일입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내일이면 딱 41주년. 오늘 광주 얘기를 가지고 오셨네요.

◆ 김정훈> 1980년 광주에서 누구에 의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도 밝혀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증언을 해줘야 함에도 침묵을 지켜온 이들이 있어요. 바로 광주시민들 진압에 나섰다가 살상하기까지 했던 계엄군들입니다.

◇ 김현정>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지휘관들은 억지로 끌려나와서라도 어쨌든 입장을 밝히긴 했는데 그 당시 투입됐던 계엄군들은 직접 목소리를 듣기가 어려웠어요.

 

◆ 김정훈> 그렇습니다. 지난 3월에 처음으로 전 공수부대원이 자신의 사격으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 유족을 찾아서 사죄하기도 했었고요. 또 5·18 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지난주 일부 계엄군의 증언을 소개하기도 했지만 2만 명으로 추산되는 그 계엄군 전체 규모에 비춰보면 아직은 대단히 미미한 실정이죠.

지난 3월 16일 오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참여했던 공수부대원(왼쪽)이 자신의 총격으로 사망한 고(故) 박병현 씨 유가족에게 사죄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제공

 

◇ 김현정> 저는 늘 의문인 게, 계엄군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던 거잖아요. 그 많은 계엄군들이 어떻게 이렇게 입을 여는 사람이 없나. 40년이 지나도록. 조금 의아했어요.

◆ 김정훈> 저도 그 침묵의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또 그들이 아직 알리지 않은 진실들도 궁금했고 나아가 사과의 뜻은 없는지도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어렵사리 수소문을 해가면서 계엄군 출신들을 만나봤는데 현재까지의 그 취재 내용들을 한번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 김현정> 이분들을 찾기도 어려웠을 것 같고 설득하기도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 김정훈> 사실 시간을 두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증언을 채록했는데 마음을 연 뒤로는 당시의 상황들을 비교적 솔직히 얘기를 하더라고요. 먼저 11공수부대 소속 사병으로 광주에 투입됐던 전 계엄군의 얘기를 먼저 들어보시죠.

[녹취: 익명의 계엄군]
"당시 7공수와 11공수가 먼저 들어가서 진압하면서 내가 보기에도 무자비할 정도로 진압했어요. 도청 앞 총격 사건 전에도 시신 부검해보면 9명이 죽었어요. 사흘에 걸쳐. 맞아죽은 거예요. 그거는. 맞아죽었다는 건 뭐냐면, 군홧발로 짓이기고 진압봉으로 때려 머리 맞으면 박살나죠. 그렇게 죽은 거예요."

◇ 김현정> 익명임을 말씀드리고요. 총격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그 전에도 맞아 죽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

◆ 김정훈> 계엄군들의 시각은 엇갈리기도 했는데 자신들의 진압 자체가 과도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인정했습니다. 당시 역사적인 배경도 이해할 필요가 있겠는데요. 바로 전 해인 1979년에는 부마항쟁이 일어났지 않습니까? 그때 계엄군이 투입돼서 상황을 종결시켰어요. 1980년대 4월에는 이른바 사북사태가 터지면서 이때도 계엄군의 투입이 검토됐습니다. 그러니까 전두환 신군부는 시민들이 자신의 뜻에 반하는 목소리를 내기만 하면 바로 군화발로 짓밟으면 된다, 이런 생각을 품게 된 겁니다.

5.18 당시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하고 있는 계엄군. 5.18기념재단 제공

◇ 김현정> 80년 광주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죠?

◆ 김정훈> 광주 시민들을 억눌러버리면 그만이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시민들이 예상외로 강하게 저항을 했고, 계엄군이 오히려 당혹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11공수부대에서 하사로 근무했던 전 계엄군의 목소리입니다.

[녹취: 익명의 계엄군]
"그 당시 훈련을 세게 시켰어. 그래서 조패면 끝나겠지 했는데…그렇게 생각해서 강경진압을 하는데 그게 안 막혀 들어간 거야. 우리가 좀 과격하게 했지. 그 정도로 하면 금방 끝날 줄 알았어. 일반 부대도 아니고 특전사고…밀리거나 깨진다든가 이런 건 생각도 안 했지."

◇ 김현정> 오늘 굉장히 중요한 음성자료들이 나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심층취재팀 김정훈 기자가 설득해서, 계엄군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제 목소리를 듣고 계시는 건데요. 그러니까 밀리거나 깨진다거나 이런 건 생각도 못 했다, 계엄군들은. 이렇게 하면 진압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충돌이 격화됐고 결국은 발포까지 갔다, 그 얘기인가요?

◆ 김정훈> 그렇습니다. 이 가운데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계엄군들 사이에 오인사격으로 큰 피해가 발생한 점들이 사태를 더 키웠어요. 그러면서 처음에는 저격수 위주로, 그리고 장교들, 부사관들에게 실탄이 제공됐습니다. 실탄을 받고 나서는 시민들에 대한 살상도 곳곳에서 이어졌죠. 3공수부대 중사로 광주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시민들이 탄 차 기름탱크에 총격이 가해지기도 했다, 이렇게 증언을 했는데요. 직접 들어보시죠.

[녹취: 익명의 계엄군]
"사병들한테 줬다가는 괜히 사고 저지르니까 부관들이 쏜 거야. 중위들이. 지나가는 차를 쐈는데, 저기 가서 불이 붙은 거야. 차가 얼마나 빠르다는 얘기야. 타이어 바로 앞에 기름 탱크에 맞아서 불이 붙어버린 거야. 거기서는 그냥 가버리고 그 차는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 김현정> 뭔가 의심스럽다면 차를 세워서 확인이라도 해야 될 텐데 확인도 없이 그냥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는 거예요?

◆ 김정훈> 사실 전쟁에서도 그래서는 안 될 텐데요. 이성을 잃은 발포가 이어진 것이죠. 직접 만난 계엄군 중엔 시민을 상대로 한 조준사격의 경험을 털어놓은 이도 있었습니다. 지금껏 주변에도 꺼내놓지 못한 이야기라고 하는데 들어보시죠.

[녹취: 익명의 계엄군]
"출입이 통제됐는데 나하고 거리가 한 100m 정도 되는데 갑자기 차 시동이 걸리는 거야. 출입이 안 되는 데인데 시동이 걸리니까. 이 뭐야? 그 차가 앞으로 가는 거야, 시내로 가는 거야. 그 상황에서 '이게 나쁜 놈이구나'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정조준하고 세 발 다다닥 당겼어. 맞았지. 만약 경험이 많으면 생포할 수 있겠다 (싶은데), 그때 경험이 없고 겁이 나니까 그랬죠. 한동안 참 마음이 많이 아팠죠. 젊은 친구인데, 이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데…억울하게 죽은 사람 있죠. 말도 안 되게…억울하게 죽은 사람 많아요."

5.18 기념재단 제공

◇ 김현정> 이분 입장에서는 어렵사리 고백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유족들 입장에서는 지금 이게 그야말로…

◆ 김정훈> 가슴이 찢어지죠. 그 한이 풀릴 수 없을 겁니다. 사실 한 계엄군은 그때 광주 시민들이 여전히 지금 뼈에 새긴 그 한을 직감했다고도 해요. 광주시민들의 최후 항전이 참혹하게 끝난 게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 진압작전 때였죠. 그날 새벽에 계엄군이 도청을 향해 갈 때 이를 지켜봤던 24사단 소속의 한 장교는 광주시민들의 피를 토하는 그 숨죽인 흐느낌을 생생하게 느꼈다고 하는데요. 또 들어보시겠습니다.

[녹취: 익명의 계엄군]
"마지막 27일 도청에 새벽에 계엄군이 들어갔는데 시민들이 아무도 안 자고 있어요. 다 귀대고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나 듣고 있죠. 그게 느껴져요. 쥐새끼 소리 하나 안 들리는데 아는 거야. 본능적 감감적으로 느껴져. 아무도 안 자고 있구나. 그때부터 '계엄군이 진입하고 있습니다' 여자분이 계속 방송하고. 그때 제가 느꼈던 시민들의 불안감 두려움, 이걸 온 몸으로 느끼면서 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 한과 아픔이 얼마나 오래갈까. 10년, 20년, 30년? 한 세기 간다고 풀어질까 하는 생각을 그때 했어요."

◇ 김현정> 이 계엄군은 그때도 그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저들의 한이 풀어질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진압을 했다.

◆ 김정훈> 그 말대로 됐죠.

5.18 기념재단 제공

◇ 김현정> 혹시 말입니다, 김정훈 기자. 이 계엄군 가운데 반성한다, 혹은 유족들 만나 사과하고 싶다, 이런 분은 한 분도 없었습니까?

 



◆ 김정훈> 사실 제 취지는 그런 점들이었는데요. 적어도 제가 접한 계엄군 가운데 미안한 기색이 없는 분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사과에 나설 분을 찾기도 사실 쉽지는 않았는데 먼저 한번 들어보시죠. 3공수부대 소속 장교로 광주에 투입됐던 이의 목소리입니다.

[녹취: 익명의 계엄군]
"광주 사태에 밝혀지지 않은 것들도 있고, 이런 시점에서 5.18 광주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으니까, 그런 사람들한테 미안한 것도 있을 게 아니냐, 이런 생각이 들어요. 출동할 당시 중위고, 위에서 상부에서 하라는 대로 하는 게 하급 장교들이니까. 돌아가는 걸 잘 모르니까.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나니 그것은 모든 게 많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을 해요."

◇ 김현정> 우리는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 이런 얘기 같아요.

◆ 김정훈>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신의 가해행위를 고백하면서 피해자에게 사과를 한 계엄군은 현재까지 딱 한 명뿐입니다.

◇ 김현정> 한 명.

◆ 김정훈> 사과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라고 하면서 자기정당화를 하는 부류가 있고요. 또 한편은 미안함과 반성의 마음이 있지만 용기를 내기 어려워하는 분들도 적지 않더라고요.

◇ 김현정> 내가 나서서 사과했다가 나한테 온갖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

◆ 김정훈> 실제 계엄군의 첫 사과를 이끌어냈던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쪽으로도 사과를 하고 싶다, 이런 의향을 밝힌 계엄군들이 추가로 더 있긴 한데 위원회 측은 그 사과가 수용될 수 있는지를 먼저 좀 가늠해 보고 있다고 해요. 물론 그것이 사과의 전제가 될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 김현정> 수용될 수 있다는 건 유족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타진해 본다…그런데 저는 들으면서 이런 생각도 들어요. 계엄군들은 이 당시 하급 군인들이었다면 지휘부에 있었던 신군부, 그들은 사과는커녕 반성도 하고 있지 않잖아요.

◆ 김정훈> 그 모습을 보면 이분들이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지휘부에 대한 원망이 없을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먼저 들어볼게요. 11공수 하사 출신의 계엄군 두 사람의 말입니다.

[녹취: 익명의 계엄군]
"전두환씨가 민간에 양도하고 대통령이 안 됐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나 같은 사람은 피해자도 되고 남한테 피해를 줬을 수도 있는 사람이지만. 난 당시 전두환씨 말을 듣고 계엄에 뛰었던 사람이지만, 그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도 피해를 봤고…"

"모든 사태는 군부에서 책임져야지. 왜 공수부대를 내려보냈으며, 위에서 대통령이나 정호용이나 책임져야 하는데. 우리 동료끼리도 얘기해. 전두환이가 사과하고 무릎꿇고 빌어야 한다고… 60을 넘어 70대가 되다 보니까 당시의 기억이 더 안나, 잊어버리고 말야."

전두환. 박종민 기자

◇ 김현정> 그러니까 이분들 입장은 전두환 씨는 우리한테도 사과해야 된다, 그런 거죠? 우리도 가서 하라고 하니까 했지만 그게 하기 좋은 일도 아니었고.

◆ 김정훈> 그 못할 짓을 하게 되었다는 거죠. 답답함이 있는데 저는 또 이분들 말 중에 '나이가 60을 넘어서 70대로 가니까 당시 기억이 더 안 난다' 이런 말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봐요. 그러니까 계엄군들의 증언을 쭉 들어보면 기억이 혼재해 있거나 남의 경험을 자기 경험처럼, 아니면 자기 경험을 남의 경험처럼 털어놓는 그런 대목들이 가끔 눈에 띄더라고요. 그러니까 이게 복잡하고 혼란한 기억들이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게 아무리 끔직한 경험을 했다지만 지금 41년이 지났죠. 그리고 직후에는 아무것도 발설하지 말라는 군의 지침이 있어서 10년 넘게 동료들끼리도 입을 닫았다고 해요.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이 복원되기 시작한 90년대 들어서는 손가락질이 두려워서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도 기억의 조각들이 찬찬히 맞춰볼 기회를 놓쳐버린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일부 기억들은 망각되거나 또는 왜곡될 수도 있는 것이죠.

◇ 김현정> 그렇죠. 그런데 이분들이 다 고령으로 접어드니까 더 늦지 않게 고백을 받고 정리, 기록하는 이런 작업들이 이루어져야 될 것 같은데요.

◆ 김정훈> 지금 진실규명을 위해서라도 시급한 일인데요. 이 부분은 송선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위원장의 말도 들어보시죠.

 



[녹취: 송선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위원장]
"핵심 관련자들은 사반세기가 지나도록 단 한마디의 진실고백이나 사죄가 없기 때문에 그러면 그분들의 의도와 그분들의 지시가 현장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실제적으로 투입군들의 증언을 통해서 확보할 수밖에 없다."

◇ 김현정> 지휘부의 진실 고백이 없기 때문에 현장에 투입됐던 계엄군들의 증언은 더 중요하다는 말이잖아요.

◆ 김정훈> 그렇습니다. 그렇게 고백이 터져나오면서 그들 스스로가 이제 상황을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 테고요. 그것이 이제 진심어린 사과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를 해보는 것이죠.

◇ 김현정> 지난해부터 김정훈 기자가 한 사람, 두 사람 찾기 시작해서 시작이 됐던 취재입니다. 계엄군의 증언을 생생하게 들으셨는데 취재가 여기서 끝이 아니죠?

◆ 김정훈> 그렇습니다. 광주 5·18민주화운동이 온전한 역사로 자리잡을 때까지는 취재가 계속돼야 될 것 같고요. 증언이든 사과든, 의향이 있는 계엄군 출신 여러분의 제보도 기다리겠습니다.

◆ 김정훈> 여기까지, 훅뉴스 김정훈 기자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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