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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삶과 마지막 여정: 월남전 참전부터 천국 환송까지 - 국립서울현충원에 영면하시다

창(窓)/건강窓

by dobioi 2024. 11. 19.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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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전 참전 >

필자의 아버지께서는 1970년 쯤에 월남전에 참전하셨고, 귀국하신 뒤에 일반인으로 열심히 살아오셨다.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로부터 일부 비하인드 스토리가 전해졌지만, 개인적으로는 돌아가신 뒤에야 진실의 일부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주로 타자기로 문서처리를 하셨기에 천막 생활을 하신 것으로 말씀하셔서, 고엽제와는 무관한 줄 알았지만, 언제부턴가 고엽제 후유증 증세가 확인되기 시작했고,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힘들어하시는 모습에 온 가족의 마음이 무너졌다.

 

< 건강 이상 >

활달하시고, 건강하셨던 아버지께서는 힘든 사업을 거뜬히 해내시고, 가족을 건사하시기에 충분했었지만, 어느 시점부터 여러가지 사정과 건강 문제로 모든 걸 정리하시고 시골에서 지내고 계셨다.

 

그러다가 이유모를 증세로 운전 중 편마비가 오게 되고, 손수 운전하여 병원을 찾으실 정도로 정신이 또렷하시고, 강인하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러셨다.

그리고, 편마비를 이겨내기 위해 부지런히 동네 중학교 운동장에서 걸으셨고, 공기 좋은 곳에서 회복되셨다. 반평생 운전하셨고, 마지막 타시던 차도 더이상 운전이 불가하다 판단되어 면허증을 반납하시고, 차량도 처분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회복되시나 싶었는데, 또 다시 마비 증세가 나타났고, 몸져누우시게 됐는데, 그동안 다니시던 노인주간보호센터에 불편함없이 걸어서 가셨지만, 이후에는 제대로 걷지 못하시고, 종종 걸음으로, 마음은 앞서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처럼 어렵사리 이동하며 다니셨다.

 

안타까운 마음에 보폭을 넓게 하여 천천히 걸으시라 권했지만, 그게 맘처럼되지 않으셔서 안타까움이 더 컸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노화로 인한 현상이겠다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었다. 너무 늦게서야 부친의 불편함이 고엽제 후유증인 것을 알게 되었고, 돌아가시기 직전에서야 단순히 '월남참전유공자' 에서 '고엽제후유의증' 으로 바뀌게 된다. 늦었지만 그래도 모친께서 여러모로 알아보시고, 어느 정도 부친께서 움직이실 때에 처리를 해뒀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 병원 입원 >

지난 설날에도 온 가족이 모여서 유쾌한 명절을 보냈고, 심지어는 장거리를 이동하여 친척 집에 방문할 정도였었는데,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지셨고, 결국 병원에 입원하시게 된다.

그리고, 원인을 찾기 위해 여러 병원을 전전긍긍하게 되었고, 불과 얼마 전에는 '집에 가고 싶다'며 휠체어에서 작은 소망을 말씀하셨다.

 

급격하게 쇠약해지셨고, 뒤늦게 아들들이 돌아가며 병간호를 해드리고, 요양보호사를 통해 간병을 이어갔지만, 열악한 간병 시스템으로 건강이 더이상 회복되지 못하시게 된다. (상당히 아쉬운 부분 중의 하나다.)

 

< 마지막 만남 >

어느날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듣고 찾아뵌 뒤에, 다시 회복되셔서, 이 때는 모친과 자녀손들이 다 모였고, 부친께서는 큰아들이 끄는 휠체어를 타고 오셔서 카페에 모인 자녀손들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시게 된다.

다시 뵐 수 없었을 줄 알았던 가족들에게는 정말 귀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큰아들이 간병을 하여 얼마나 정성스럽게 돌봐드렸는지, 얼굴에서 오히려 광채가 날 정도였다.

 

< 임종 >

불안한 마음으로 연락을 기다리다가, 더 이상 차도가 없고, 더 악화되시지도 않는 상황이 지속되던 차에, 바이탈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연락이 왔고, 가까이 사는 막내 아들이 방문하여 보고, 이어서 임종을 지키게 된다.

전화로나마 아버지와 통화하고, 장례 절차를 진행하기에 이른다.

 

< 천국환송식 - 장례 >

경황이 없고, 직접적인 경험이 없던 상황이어서 미숙했름에도,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장례가 준비되고, 진행되었다.

알릴 수 있는 곳에 먼저 연락을 하였고, 각자의 직장에, 학교에 연락하고, 교회에 장례 절차를 상의하게 된다.

장례식장을 막내가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정하게 되고, 병원에서 장례식장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동안 먼 지역에 있던 아들들은 가족과 함께 이동하게 된다.

 

처음 겪는 것이라 잘알지도 못하는 것을 해내는 것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잘못된 것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기로 합의하고, 무난하게 진행하기로 한다.

 

그리고, 장례식 첫날이 일요일(주일)이라 공공기관은 이미 연락이 안되는 상황이었으나 이미 국립묘지가 준비되었다고 하셨기에 검색하여 찾아보게 된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사이트를 찾아내고, 정보를 검색해보고, 연락을 취한다.

 

https://www.ncms.go.kr/NationalCemetery/guide/guide/hyun/

 

국립대전현충원< 신청안내< 안장 신청안내< 국립묘지 안장관리시스템

국립현충원의 안장(이장) 신청 안내입니다. 국립현충원 안장(이장) 신청에 따른 서류 제출 방법 및 승인 절차 등을 다음과 같이 알려드립니다. 유골의 처리 01 유골의처리 02 신청방법 03 심사 04

www.ncms.go.kr

 

전화 받으시는 담당자는 왜 이제 연락을 했느냐 했지만, 이미 휴일이었으므로 그럴 상황이 아니었노라 설명했고, 후속 조치에 대한 안내를 받게 됐다. 그래서 뒤늦게 커다란 태극기와 대통령이 보내준 근조기를 받게 된다.

 

다 끝난 마당에 받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쉽지만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고 넘어간다.

 

< 입관 >

가족들 모두 안내에 따라서 입관을 보러 갔고, 능숙한 처리로 잘 마무리하게 된다. 모친께서는 슬퍼하셨지만, 그래도 평온한 가운데 보내드리는 과정이 이어졌다.

 

< 발인 >

교회 동생과 동생 지인이 모여서 관을 이동하게 되었고, 엄숙한 가운데 진행되었고, 고향 교회의 권사님들이 찬양을 불러주어 은혜롭게 진행되었다.

 

< 화장 >

장례식장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곧바로 동작현충원으로 이동해야 해서 별도로 개별적으로 차를 타고 이동하게 된다.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이동해주셔서 교회 봉고로 이동하시고, 여러 분들이 함께 이동해주셨다.

마침 화장장에서 대기하고 있을 즈음에 젊은이의 모친께서 통곡을 하셨고, 너무 슬펐고, 눈물을 삼켰다.

 

이른 아침에 장례식장에서 간단한 식사를 했음에도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커피도 마셨다.

이어서 1시간이 넘게 대기한 후 안내에 따라 이동하게 된다. 그리고 처음 보는 광경에 적잖이 놀라게 된다. 몇몇 분은 차마 제대로 보지 못하셨지만 대체적으로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따뜻한 유골함을 손에 들고, 차량으로 이동했고, 얼떨결에 겨우 상복을 벗고 교회 봉고에 올라탄 형은 핸드폰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이동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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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작 현충원 >

몇 시간을 달려 동작현충원에 도착했다. 준비한 서류를 제출하고, 안내를 받아 간단한 예식을 거친 뒤 장손 같은 필자의 아들이 사진을 들고, 유골함은 필자가 들고, 위패는 막내의 큰 아들이 들고 앞서 이동했다.

 

동작현충원에서 준비해준 유골함에, 절차에 따라 잘 처리했고, 이동했고, 설명과 함께 봉안되었다.

주변에는 아직 사진이 부착되지 않은 이름표가 있었고, 다른 칸에 가보니, 제대로 된 사진이 부착되어 있었다.

 

뒤늦게서야 준비된 사진의 크기가 맞지 않다는 걸 알아채고, 다음날 반명함판 사진을 2장 준비하여 다시 찾게 된다. 다행히 거리가 멀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다. 대전이었으면 엄두도 못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지막으로 자리를 함께 해주신 고향 교회 담임목사님께서 간단하게 기도로 마무리해주셨다.

먼 길을 와주셨기에, 다시 내려가야 했으므로 감사인사를 전하고, 작별하게 되었다.

 

 

< 귀가 >

차로 이동할 수 있었지만, 형은 앞서 서술한 대로 핸드폰 말고는 갖고 있는 것이 없어서, 심지어는 지하철 패스도 없어서, 겨우 1만원을 들고 머나먼 여정을 다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필자가 귀가 후 걱정되어 전화를 했으나, 배터리가 없어서인지, 전화는 꺼져있었고, 덕분에 짧지만 긴 맘고생을 했다.

한참 뒤에야 도착한 형과 통화할 수 있었고, 향후를 도모하며 통화를 마쳤다.

 

이렇게 3,4일 간의 역사가 마무리되었고, 험난한 세월을 사셨던 아버지를 평안히 천국으로 보내드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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