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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자 세종대왕 유물이 평민길 근처에서 나온 이유는… 중인 평민 터 숨겨진 왕실 보물 임진왜란 피해 막기 위해 숨겼을 것 관아 아전들 자신 집터에 숨긴 듯 구텐베르크가 제작한 활자보다 ..

시사窓/사회

by dobioi 2021. 7. 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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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이고 추측이긴 하지만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그렇더래도 구텐베르크가 제작한 활자보다 앞서는 중요한 유물들이 발굴되어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상황이 정황이 기록된 내용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여러가지 가정과 추측이 가능하겠지만 좀 아쉽다. 이정도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소설이 나오기에 충분할 거 같다. 작가의 상상이 들어간 애국심 고취할 수 있는...

 

 

문명발상지의 여러가지 유물로 영화 소설 음악 만들기 쉽지 않나?

특히나 국뽕에 깊이 심취해있는 문정부라면 가능할 듯도 한데... ^^;;;

 

 

http://cbs.kr/pUp4oF

 

발굴자 "세종대왕 유물이 평민길 근처에서 나온 이유는…"

■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20~09:00) ■ 진행 : 손수호 변호사 (김현정 앵커 대신 진행) ■ 대담 : 박미화 (수도문물연구원 유물관리팀장) 누가 왜 하필 거기에 파묻었나.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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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자 "세종대왕 유물이 평민길 근처에서 나온 이유는…"

 

중인과 평민 터에 숨겨진 왕실 보물
임진왜란 때 피해 막기 위해 숨겼을 것
관아 아전들이 자신들 집터에 숨긴 듯

■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20~09:00)
■ 진행 : 손수호 변호사 (김현정 앵커 대신 진행)
■ 대담 : 박미화 (수도문물연구원 유물관리팀장)

 


누가 왜 하필 거기에 파묻었나. 인사동 피맛골 미스터리. 오늘은 목요일이기는 합니다만 탐정 손수호가 아닙니다. 인사동 피맛골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조선전기 유물 관련된 얘기인데요. 엄청난 것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세종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걸로 추정되는 금속활자 무려 1600여 점, 그리고 세종이 단 4개만 만들었다는 천문시계.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귀한 물건들이 다른 곳도 아니고 피맛골의 민가 창고에서 나온 건지 저는 이거 너무 궁금하거든요. 그래서 발굴에 직접 참여한 고고학자를 모시고 궁금증을 풀어보겠습니다. 이거 굉장히 기대가 되는데요. 수도문물연구원 소속의 박미화 유물관리팀장입니다. 안녕하세요.

◆ 박미화> 반갑습니다.

◇ 손수호> 오늘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요.

◆ 박미화> 감사합니다.

◇ 손수호> 저도 오늘 개인적인 궁금점도 많이 좀 풀리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궁금한 것은 도대체 왜 거기인가? 대체 왜 거기서 이런 게 나왔는가거든요. 그거를 확인하기에 앞서서 먼저 유물이 어디서 나온 건가, 나온 장소가 어디인지부터 설명을 하고 시작해야 될 것 같습니다.

◆ 박미화> 조사지역은 현재 종로2가 사거리 북서지역인 탑골공원 맞은편에 위치합니다. 조선시대 이곳은 견평방이라고 불리던 곳으로 당시에도 큰 길이었던 운종가가 인접하고 재화의 교류의 중심지였던 시정냉가, 그리고 피맛골이 위치하고 있고 사람들이 굉장히 몰리던 중심가였습니다. 조사 지역은 그 중심가에서 안쪽에 위치하던 지역이었는데요. 이곳들은 양반들이나 또는 그 상업에 관련된 종사자들이 살던 지역이었습니다. 문헌조사 결과 이 조사 지역은 관청이나 관련된 시설이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 손수호> 그래요.

 


◆ 박미화> 이번에 금속유물들이 출토된 것은 시정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건물지였는데요. 세 칸 정도 되는 건물 안쪽에서 확인이 되었고 건물지의 내부에서 온도시설들이 확인되지 않아 창고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인사동에서 발견된 조선 전기 금속활자 공개. 연합뉴스


◇ 손수호> 그러면 이게 건물 허물고 새로 건물 지으려고 하다가 땅 파보려고 하니까 나온 거예요?

◆ 박미화> 네, 맞습니다.

◇ 손수호> 보통 이렇게 돼서 개발 지연되고 아예 일부 보존하고 이런 식으로 개발하는 사례들이 인근에 많이 있었죠?

◆ 박미화> 네, 많이 있습니다.

◇ 손수호> 봉평동이나 이런 곳도 있었고.

◆ 박미화> 네, 맞습니다.

◇ 손수호> 저도 제가 좋아하는 그런 지역이기도 한데 그런데 어쨌든 평범한 곳이다. 관청이 있었던 곳이 아니다. 민가의 창고에서 나왔던 게, 나온 게, 당시 민간인이 일반인이 갖기 힘든 유물들이잖아요.

◆ 박미화> 네, 맞습니다.

◇ 손수호>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발견된 건지 소개 좀 해 주시죠.

◆ 박미화> 이번에 확인된 유물들은 다 금속유물들인데요. 금속활자 1600여 점, 그리고 해시계와 별시계인 일성정시의, 물시계의 부품인 주전, 총통, 종, 이런 것들이 확인이 됐습니다. 이 유물들의 공통점은 개인이 제작하거나 사용할 수 없는 물건들이라는 점입니다. 먼저 금속활자는 나라에서 주자소라는 관청을 만들어서 제작하고 사용했기 때문에 민간인들이 사용할 수 없었고 특히 이번에 확인된 한글 활자에서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당시에 표기법으로 사용된 동군정운식의 표기들이 확인이 돼서 좀 주목이 되고 있는 부분이 있고요.


◇ 손수호> 지금 쓰지 않는 그런 것들도 있는 거고 그렇죠.

 


◆ 박미화> 맞습니다. 그리고 일성정시의 같은 경우에는 세종년 간에 분명한 기록이 있어서 주목이 되는데요. 세종 19년인 1437년에 일성정시의 4개가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2개만이 한양 도성 내 위치하고 있었고요.

◇ 손수호> 이게 천문시계인가요, 그러면?

◆ 박미화> 천문시계도 되고 해시계도 됩니다.

◇ 손수호> 해시계.

◆ 박미화> 그래서 그 기록에 설명이나 구조가 굉장히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이것들이 당시에 얼마나 정성들여 만들었는지 좀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물시계나 총통들도 알다시피 장영실, 김지화 같은 관리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모두 다 왕실 소유의 물품들로 생각이 됩니다.

◇ 손수호> 그리고 이게 금속 재질을 보면 금속의 종류를 보면 동, 구리, 이런 것도 많이 있었다면서요.

◆ 박미화> 맞습니다. 지금 저희가 확인된 유물들이 색깔이 굉장히 황색을 많이 띠는 편이 있어서 거의 순동에 가까운 구리다, 주석이 거의 함유되지 않은, 그렇게 추정을 하고 있고요. 이것들은 정확한 분석 결과를 해 보면 알 수 있겠습니다.

◇ 손수호> 그런데 만약에 정말 순동이라면 이게 당시에 굉장히 좀 가치가 높은 그 금속만 보더라도 가치가 높은 거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들기는 해요.

◆ 박미화> 맞습니다. 구리는 당시에 이거를 화폐로도 만들고, 구리로. 그리고 또 무기도 만드는 굉장히 중요한 재료이자 또 재화였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구리 같은 경우에는 완성된 기물이라도 다시 녹여서 재사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굉장히 사랑받던 재료였는데요. 그래서 이것들을 왕실에서도 관리하기 위해서 가격을 제한시키고 매매가격을. 아예 매매를 금지시키는 그런 정책들을 펼칠 정도로 굉장히 중요한 재화였습니다.

◇ 손수호> 지금 유튜브와 레인보우로는 계속해서 유물들 사진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고요. 보면 볼수록 신기합니다, 정말. 이게 땅속에 계속 묻혀 있었구나. 이런 생각에 참 신기하고 흥분되기도 하는데. 결국 설명해 주신 걸 들어보면 이게 아무리 봐도 민가에서 나올 만한 물건들이 아닌 거예요.

◆ 박미화> 네, 맞습니다.

 


◇ 손수호>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민가를 개발하다가 나오는 것들도 있잖아요. 민가에서는 어떤 유물들이 나옵니까?

◆ 박미화> 주로 조선시대 사용되었던 도자기들이 80% 이상이고요.

◇ 손수호> 도자기.

◆ 박미화> 네, 그리고 이후에는 지금 나온 것과 같이 청동으로 만든 그릇, 제기들. 목기로 만들어진 신발, 빗, 이런 것도 확인이 됩니다.

◇ 손수호> 그런데 완전히 거리가 머네요.

◆ 박미화> 이거 되게 이례적이죠.

◇ 손수호> 그래서 이제 본격적으로 궁금증을 풀어봐야 될 것 같아요. 도대체 일반적으로 민가에서 나오지 않는 이런 엄청난 것들이 도대체 왜 이 피맛골 민가 창고에서 나왔는가. 이유가 뭔가. 궁금합니다.

◆ 박미화> 조선시대 한양 도성 내를 발굴하다 보면 현재와 가까운 20세기 층부터 조선시대 건국시기 15세기 층까지 층층이 레이어로 확인이 됩니다.

◇ 손수호> 그러면 궁금한 게 예전에, 몇 백 년 전에는 그 땅을 썼다가 그러면 그 위에 흙을 어디서 가져온 다음에 덮은 다음에 또 집을 짓고 있다는 얘기인가요? 그 층이 생겼다는 얘기는.

◆ 박미화> 네, 맞습니다. 한양 도성 내가 습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지반이 약합니다. 그래서 기존에 있던 것들을 다시 해체하지 않고 쓰레기들을 기반에 둔 상태에서 다시 지면을 다지고 그리고 또 건물을 짓고 또 지면을 다지고 건물을 짓고 이렇게 되기 때문에 지금 조선시대 문화재는 현 지표에서 2, 3m 밑에서 확인이 됩니다.

◇ 손수호> 그렇게 됐기 때문에 우리가 여러 가지 유품들을 확인할 수 있겠네요.

◆ 박미화> 네, 맞습니다.

 


◇ 손수호> 그렇군요. 그래서 도대체 왜 거기 있냐, 이게 왜 거기서 나왔느냐, 이런 것들 궁금해요.

◆ 박미화> 그 레이어 층위가 시기별로 확인이 되는데 16~17세기 층위를 조사를 하다 보면 물건들을 매납해서 있는 그런 유구들이 종종 확인이 됩니다. 그런데 그 물건들 대체로 보면 귀한 것들이에요. 백자, 항아리, 대형화로, 제기, 총통, 이런 것들이 확인이 되는데 왜 이런 것들이 확인이 되느냐, 살펴보면 17세기에 가장 큰 사건이 임진왜란, 또 병자호란 같은 전쟁이 있습니다. 당시에 그 집안의 귀한 물건이었던 것들을 전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묻어둔 것으로 양상들로 저희가 지금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 손수호> 그러면 전란에 이게 다 없어지거나 불타거나 사라질까 봐 숨겨놓은 거다?

◆ 박미화> 네, 맞습니다.

 

 

◇ 손수호> 그런데 숨겨놓더라도 이게 민가에 거주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을 거잖아요.

◆ 박미화> 그렇죠. 그게 지금은 밝혀지지 않는 부분인데요. 이거는 앞으로 추후에 남겨서 이제 문헌조사를 통해 밝혀져야 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손수호> 그러면 저희가 물론 학자이시기도 하고 또 연구를 하시니까 아무래도 확인된 거 위주로 말씀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약간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약간의 좀 상상력을 동원해서 좀 시나리오를 써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희가 추측이라는 걸 미리 말씀을 드리고요. 확실하게. 부담 없이.

◆ 박미화> 저희가 연구원 내에서 약간 농담 반 그리고 또 투정 반으로 하는 얘기는.

◇ 손수호> 그런 게 제일 재미있습니다.

◆ 박미화> 어쨌든 왕실에서 사용되었던 동기들도 사용 기간이 다 되면 이것들을 다시 녹여서 이제 재주조를 해야 되는데 과연 이거를 왕실에서 어떤 식으로 활용할 것인가.

◇ 손수호> 그게 다 물품들이 사용기간이 있어서 얼마 지나면 다시 만들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 박미화> 그렇죠. 활자 같은 경우에는 30년 동안 녹여서 재주조 하기 때문에 남아 있는 예가 별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발굴이 굉장히 중요한 성과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어쨌든 그 중간 체계랄지, 그 관리하던 부속시설이 있었기 때문에, 관리하던 부속시설이나 중간 관리자가 위치하던 곳이 아니었을까, 이런 추정을 저희들이 조심스럽게 해 보기는 합니다.

연합뉴스

 


◇ 손수호> 그러면 그렇게 몰래 빼돌린 건지 아니면 정말 전란을 피하기 위해서 숨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공식적인 절차에서 비껴있었기 때문에 지금 발견됐다고 볼 수 있겠네요?

◆ 박미화>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손수호> 저는 이렇게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들 일정 기한 지나면 녹여서 다시 만들기 때문에 사라진다, 이거 처음 알았습니다. 굉장히 흥미롭네요. 그러면 위치, 장소, 이것도 좀 궁금해요. 아니, 그때 왕실에서 하거나 정부 관리들이 하는 일이었으면 거기에 묻거나 또는 다른 데 묻을 수 있는데 굳이 피맛골에 있는 민가 창고라니. 그 이유도 좀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박미화> 글쎄요. 그것도 지금으로서는 제가 말하기 조심스러운 부분인데 어쨌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재화의 교류 중심지이고 굉장히 사람이 많이 몰리고 그러던 곳이다 보니까 좀 그런 상황 속에서 그런 유통의 과정 속에서 그것들이 거기에 묻어 있지 않았을까, 그런 추정을 좀 해봅니다.

◇ 손수호> 사실 정말 다양한 가능성이 있기는 한 것 같아요.

◆ 박미화> 네, 맞습니다.

◇ 손수호> 그래서 도대체 왜 거기에 이게 거기에서 발견됐나를 찾아가는 것도 고고학계의 연구과제가 아닐까, 역사학계의 과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어쨌든 이런 대단한 유물들이 발견됐습니다. 이게 학계에서도 많이 흥분했을 것 같은데요.

◆ 박미화> 맞습니다. 그런 출토품들은 기록에만 남아 있지 실제 전해지는 자료가 없어서 각 분야, 학계에서도 굉장히 탐구의 대상이었던 영역이었는데요. 이것들이 실물로 확인이 되었고 실물로 확인된 것도 대단한 성과인데 고고학적인 발굴로 이것들이 확인이 되고 또 이제 출토 맥락이 있다는 점, 이것들은 굉장히 흥미로운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손수호> 그리고 또 가장 친근한 게 금속활자인 것 같아요. 금속활자도 아무래도 언제 거냐, 이게, 그리고 우리나라가 금속활자 관련해서 아주 엄청난 기술을 당시에 가지고 있었는데 이걸 또 증명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최초라는 어떤 기록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이번 유물이 그런 증거가 될 수도 있을까요?

◆ 박미화> 금속활자는 이미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이 있기 때문에 최초라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이제 조선시대 활자로만 살펴본다면 지금까지 전해지는 유물들이 모두 조선후기에 좀 치중되는 편이어서 조선전기 활자에 대한 연구가 좀 미진했었습니다. 그래서 책으로만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정체가 굉장히 궁금했었는데 이번에 확인된 활자에서 그 세종대왕 때 표기법인 동국정운식 표기가 확인되어서 조선 전기의 활자들로 확실시되고 있고요. 또 더 나아가서는 조심스럽지만 학자분들께서 갑인자, 1443년에 제작된 갑인자로 추정되는 활자들이 확인이 되어서 이것들은 구텐베르크가 제작한 활자보다 앞서는 시기의 활자들이거든요. 그래서 이것들이 밝혀진다면 정말 중요한 성과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손수호> 네, 오늘 자세하게 여러 가지 성과들도 말씀해 주셔서 재미있게 잘 들었고요. 앞으로 밝혀나가야 될 것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 박미화> 네, 맞습니다.

◇ 손수호> 일도 더 열심히 하셔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고요. 오늘 인사동 발굴에 직접 참여하신 수도문물연구원의 박미화 유물관리팀장 모시고 재미있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박미화> 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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