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1958년, 열아홉 살 소년이 잉태한 2021년 누리호 안형준 국가우주정책연구센터 팀장 1958년 19세 김기용군 25세 조중석씨 길이 37.5cm, 무게 2.25kg의 4단 로켓을 제작 발사

시사窓/사회

by dobioi 2021. 11. 7. 16:08

본문

반응형

과거의 기록이 없이 현재가 없고, 현재와 미래 역시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영광이 재현되기도 하고,  사장되기도 하는 것이겠다.

 

좋은 기회가 잘 발전되기를 바랄 따름이다. 안타까운 것은 공산정부에는 기대할 게 없다는 거고, 무기화에 박차를 가하는 북한과는 상당히 괴리감 있는 정부에 안타까움을 표할 뿐이다.

728x90

이들은 과정보다는 결과와 영광에 편승하는 걸 즐기는 것 같다.

 

1992년 우리나라 최초 인공위성 우리별 1호가 발사되었으니, 본격적인 우주 개발을 시작한 지 한 세대 만에 독자적인 우주발사체를 갖게 된 셈이다

 

 

[아무튼, 주말] 1958년, 열아홉 살 소년이 잉태한 2021년 ‘누리호’

아무튼, 주말 1958년, 열아홉 살 소년이 잉태한 2021년 누리호 안형준의 안녕, 우주

www.chosun.com

[아무튼, 주말] 1958년, 열아홉 살 소년이 잉태한 2021년 ‘누리호’

 

안형준 국가우주정책연구센터 팀장

입력 2021.11.06 03:00

 

지난 10월 21일 오후 5시,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가 전남 고흥 외나로도를 배경으로 푸른빛의 불꽃을 내며 솟구쳐 올랐다. 마지막 단계인 위성 모사체를 목표 궤도에 안착시키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1.5t급 위성을 700km 고도의 지구 저궤도에 쏘아 올릴 수 있는 발사체 능력을 갖추었음을 증명했다. 누리호의 핵심인 75t급 엔진을 개발하면서 지금까지 연소 시험만 180회를 넘게 했고, 안정적으로 연소한 누적 시간이 2만 초에 이른다.

흔히 우주발사체는 국력과 과학기술력의 상징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다. 정밀 소재, 센서, 제어기술 등이 융합된 첨단 기술의 결집체이자, 이를 제작할 산업적 기반과 우수 인력을 갖추지 않으면 시도하기조차 어렵기 때문이다. 2013년 발사에 성공한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는 1단 로켓 제작에 러시아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번 누리호는 설계·제작·시험· 발사·운용까지 모든 과정이 순수 국내 기술로 진행됐다. 1992년 우리나라 최초 인공위성 우리별 1호가 발사되었으니, 본격적인 우주 개발을 시작한 지 한 세대 만에 독자적인 우주발사체를 갖게 된 셈이다.

 

1964년 12월 9일 인하공대 우주과학연구회 학생들이 개발해 인천 송도 앞바다에서 발사한 3단 로켓 IITA-7CR. 현재 인하대 교정에 복제품이 전시돼 있다. /인하대학교

 

그러나 우리나라의 로켓 개발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길다. 구소련이 세계 최초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쏘아 올렸던 1957년, 우리나라에도 로켓 개발의 붐이 일었던 것이다. 스트푸니크 발사 소식은 가난한 나라에 사는 청년들의 우주에 대한 열망을 크게 자극했다. 1958년 충북 영동에서는 19세 김기용군이 독학으로 높이 1.7m, 직경 20cm, 무게 65kg의 로켓을, 증평에서는 장현규제재소 직공이었던 25세 조중석씨가 길이 37.5cm, 무게 2.25kg의 4단 로켓을 제작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 당시 신문을 통해 알려졌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첨단 과학기술의 상징이었던 로켓 연구를 독학으로 이어갔다는 이들의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며 잃어버린 민족적 자존심을 과학기술을 통해 회복하기를 바라는 정서와 맞물려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민간 학회와 연구회도 조직됐다. 1958년 학자들을 중심으로 대한우주항행협회가 조직돼 회지인 <우주과학>을 발간하고, 서울 YMCA 회관에서 대중 강연을 수차례 열어 성황을 이뤘다. 1959년엔 협회 산하에 학생우주과학연구회가 조직됐는데, 창립 1년 만에 대학생 회원 100명이 넘는 큰 조직으로 발돋움했다. 이 중 인하대 로켓팀은 1960년 11월 인천 송도 앞바다에서 길이 2.2m, 둘레 12.5cm, 무게 120kg인 IITO-1A 로켓을 발사했고, 1964년에는 3단 로켓 IITA-7CR을 발사했다. 현재 인하대 교정에는 IITA-7CR 모형이 전시돼 있다.

 

국가 차원의 로켓 개발도 추진됐다. 1954년 국립연구기관으로 설립된 국방부 과학연구소는 1956년부터 전담 연구과를 신설해 로켓 개발에 열을 올렸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사용하고 남은 로켓포의 고체연료를 활용했지만, 동체의 설계와 제작, 내부 전기제어장치와 지상에서의 추적 장치 등을 모두 자체적으로 연구 개발했다. 연구소는 1959년 7월 인천 고잔동 해안가에서 공개 시연회를 열어, 3단 로켓 566호를 포함한 5기의 로켓을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김정렴 국방부 장관, 그리고 유엔군 사령관 카터 매그루더 외에 2만여 명의 시민이 참관했으며, 3단 로켓의 단 분리 장면을 육안으로 관측했다고 한다. 이 소식은 미국의 로켓전문지인 <Missile and Rockets> 1959년 3월 9일 자에도 소개됐다.

 

국방부 과학연구소와 대한우주항행협회로 대표될 수 있는 1950년대 말 로켓 붐은, 1960년대 초 4·19혁명과 5·16쿠데타의 정치적 소용돌이를 거치며 사그라졌다. 1961년 예산 절감 명목으로 국방부 과학연구소가 해체되고, 민간의 관심도 크게 줄어들었다. 우주 강국 일본의 우주개발이 1955년 도쿄대 이토카와 박사의 연필 크기만 한 펜슬로켓 연구에서 시작되었음을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다시 로켓 개발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1970년대 초 정부가 자주국방을 기치로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유도탄을 개발하면서부터다. 1978년 우리나라 최초의 유도탄 ‘백곰’ 개발에 성공하면서 한미미사일 지침을 체결하게 됐지만, 고체 로켓기술의 축적과 인력 양성, 항공우주 분야의 산업적 기틀을 마련하는 결실을 거뒀다. 이후 1980년대 선진국 진입을 위한 교두보로서 항공우주산업 육성의 필요성이 처음 대두했고, 1990년대 항공우주연구소의 설립과 우리별1호 발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우주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한미미사일 지침 폐기와 누리호 발사로 세계 7위의 우주 강국으로 발돋움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 2009년 시작된 누리호 개발 계획은 12년간 약 2조원의 예산이 투입된, 국내 우주과학기술 역량이 총동원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누리호는 단 12년의 노력이 만들어낸 결실이 아니다. 60여 년 전, 이 땅에서 우주를 꿈꾸고 로켓을 개발했던 이들의 못다 이뤘던 꿈과 노력이 함께 일궈낸 결실이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