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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장응복(99)씨 벌어서 남 주자 113억 기부하고 떠난 99세 의사 의사로 번 돈으로 주식 투자를 해 재산을 100억원 이상으로 불렸지만 늘 검소 배워서 남 주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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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bioi 2022. 3. 10.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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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실한 기독교 신자의 바른 생활이 그리 많이 밝혀지지 않은 것 같다. 사례가 적을 수도 있지만, 예부터 기독교 교리가 선행이나 호의를 자랑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인에게 비판이 많은 것을 해소하고 싶지만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기독교인이 통일된 것은 아니고, 신앙의 차이가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어서, 일반화의 오류 중 하나로 부정적으로 보여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기부하고 떠나는 삶을 배우고 싶다.

 

 

 

[단독] “벌어서 남 주자” 113억 기부하고 떠난 99세 의사

단독 벌어서 남 주자 113억 기부하고 떠난 99세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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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벌어서 남 주자” 113억 기부하고 떠난 99세 의사

강우량 기자

입력 2022.03.09 05:00

 

장학금 받은 학생 250명 - 본인 전 재산인 113억원을 지난 2015년부터 2020년까지 6년 동안 한동대에 기부한 고 장응복씨가 지난 2019년 경북 포항의 한동대에서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과 팔을 이어 붙여 별 모양을 만들고 있는 모습. 장씨가 기부한 돈으로 장학금을 받은 학생만 250명에 달한다. /한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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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 때 월남해 서울에서 30년간 작은 진료실을 지키며 일했던 의사가 평생 모은 전 재산 113억원을 한동대학교에 기부하고 세상을 떠난 사연이 뒤늦게 알려졌다. 지난 6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고(故) 장응복(99)씨 얘기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구절처럼 자신의 생전엔 기부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1923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의학전문학교를 나와 의사 생활을 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12월 피란길에 올랐다. 그 뒤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개인 병원인 ‘장의원’을 열고 30년간 일했다. 유족들은 “개원할 때만 해도 한남동은 서울 변두리였는데, 그곳에서 아버지는 1991년 은퇴할 때까지 밤낮으로 환자들을 돌보며 성실하게 일하셨다”고 전했다.

장씨는 의사로 번 돈으로 주식 투자를 해 재산을 100억원 이상으로 불렸지만 늘 검소했다. 자기 소유의 자가용 한 대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옷도 아내인 김영선(93)씨가 손수 뜨개질한 것을 즐겨 입었다. 대신 재산은 미래 세대를 돕는 일에 쓰기로 했다. 2015년 35억7000만원을 시작으로 2020년까지 매년 1억~50억원가량을 한동대에 기부했다. 한동대 표어 ‘배워서 남 주자’에 감명받아 “벌어서 남 주자”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 장씨가 전 재산을 기부하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도 흔쾌히 동의했다. 세 아들은 아버지가 2015년 기부를 시작하기 직전에야 거액의 재산을 모은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113억원 전 재산을 기부하고 세상을 떠난 장씨는 그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한동대 학생 250여명의 ‘키다리 아저씨’였다. 생전 그는 자기 재산을 남에게 알리거나 과시하지 않았고, 조용히 청년들의 미래를 위해 대학에 기부했다. 그가 기부한 돈으로 장학금을 받았던 박하영(27)씨는 “장응복 선생님은 친할아버지이자 정신적 지주였다”며 “도움 받은 것을 남에게 다시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고 했다.

 

장씨가 서울에 정착한 것은 1963년 용산구 한남동에 ‘장의원’이란 병원을 세우면서였다. 당시 한남동은 고급 주택들이 늘어선 지금과 달리, 도로 옆 논에서 개구리가 튀어 오르던 변두리 동네였다고 한다. 장의원은 한남동에 처음 들어선 개인병원이었다. 환자들이 몰려 밤늦게까지 진료를 볼 때가 많았지만 장씨는 늘 자신의 상황을 고맙게 생각했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장씨는 스스로를 한남동 주민들의 주치의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형편이 어려운 환자에게는 진료비를 받지 않았고,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위해 왕진도 열심히 다녔다고 한다.

 

성실히 번 돈을 허투루 쓰는 법도 없었다. 장씨의 첫째 아들 장성훈 건국대 충주병원 교수는 “집에서 생일 잔치를 열어본 적이 없고, 거실 바닥에 깔린 카펫과 삼 형제의 옷가지를 어머님께서 손수 뜨개질해 만드셨다. 한번 산 옷은 10년 이상 입는 게 기본이었다”고 했다. 둘째 아들은 교사로 일하다 정년 퇴직했고, 셋째 아들은 해외에서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장씨는 원래 고향인 황해도에 학교와 교회를 짓는 게 꿈이었다. 하지만 통일은 기약이 없어 보였고 결국 한동대에 기부를 결정했다. ‘배워서 남 주자’는 학교 표어에 감명을 받았고, 학교에 찾아갔을 때 일면식도 없는 장씨에게 웃으며 인사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기부를 결심했다고 한다. 고인과 생전에 가깝게 지낸 강신익 한동대 교수는 “검소하게 살던 분이 어느 날 학교에 매년 1억원씩 기부하겠다고 해 놀랐는데, 며칠 뒤 100억원을 전부 기부하겠다고 하시고 결국 말씀을 지키셨다”고 했다.

장씨의 세 아들도 어느 날 갑자기 기부를 하겠다고 한 아버지의 뜻을 선뜻 따랐다고 한다. 큰아들 장 교수는 “2015년 어느 날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김영길 한동대 초대 총장님과 함께 오시더니 종이 한 장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 종이에 직접 유산 상속 포기 각서 내용을 적으시며 기부 얘기를 꺼내셨다”고 했다. 그는 “아버님께서 그 큰돈을 갖고 계신 줄 알지도 못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도 내가 가져도 되는 돈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장씨의 남 모를 선행은 2015년부터 2020년까지 6년간 이어졌다. 한동대에서 “훌륭한 뜻을 알리고 싶다”고 했지만, 그는 “내가 살아 있을 때는 기부 사실을 밝히지 말아달라”며 사양했다. 강신익 교수가 수차례 설득한 끝에 “사후에는 기부를 알려도 된다”는 허락을 겨우 받아냈고 유족의 동의도 받았다고 한다. 최도성 한동대 총장은 “장응복 기부자님의 도움을 받은 학생들은 앞으로 자기가 또 다른 사람을 돕는 삶을 살면서 선행이 대물림된다는 걸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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