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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젊은 정치인의 富 축적 누가 가난을 활용하는가 어느 젊은 정치인은 가난을 내세우더니 더 큰 부를 축적했다 이런 위선자들이 가난을 아름답다 말하며 오히려 모독한다

시사窓/정치

by dobioi 2023. 5. 23.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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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적인 존재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사회에 악이라고 하는 존재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이런 것에 대한 정의를 애매하게 만든 이들이 누구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이상한 집단이 아닐까 싶은데, 이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멍청한 짓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불안하다. 이놈도, 저놈도 믿을만한 구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고, 그렇다고 취사선택하기가 어려워서 선택과 다른 세상을 살게 되는 것도 황당한 고통이라 쉽지 않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월급 얼마를 고민하며, 올라버린 물가를 생각하고, 어렵사리 편의점 도시락이나 주먹밥 사먹고, 컵라면으로 끼니를 떼우는 국민들도 많을텐데, 호의호식하면서 원하는 대로 하기만 하면 60억은 뚝딱 생기는 세상을 만들고, 그 세상이 자기 것인양,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양 자랑하며 탈당한 사람을 보면, 어떤 인간이 황당하기만 하다. 상대적 박탈감 시전하는 인간이다. 그런 더불어민주당이다. 그런 대한민국이다.

 

국회의원이 되면 법을 바꿔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초등학생들에게 전파, 학습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러다가 어떤 세상이 될지 모르겠다. 화폐가 사라지고, 가상화폐로 거래해야 하는 두번째 나라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러다가 모두 가슴 졸이며 살게 될지도, 순식간에 휴지조각으로 바뀌는 걸 두고 볼지도 모르고, 순식간 떼돈을 벌었지만 다시 순식간에 거지꼴 못면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것이 김남국 아닐까?

 

 

 

[조은산의 시선] 어느 젊은 정치인의 富 축적, 누가 가난을 ‘활용’하는가

어느 젊은 정치인은 가난을 내세우더니 더 큰 부를 축적했다

이런 위선자들이 가난을 아름답다 말하며 오히려 모독한다

가난은 극복해야 할 대상… 누가 가난을 찬양하고 권장하나

 

조은산·'시무 7조' 청원 필자

 

입력 2023.05.23. 03:00

업데이트 2023.05.23. 07:28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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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 대하여

 

1. 가난의 정의-가난의 사전적 정의는 ’살림이 넉넉지 못함. 또는 그런 상태’다. 그러므로 가난은 보통명사이며, 동시에 추상명사 지위를 갖는다.

 

2. 가난의 본질-그러나 본질적으로 가난은 청국장이다. 혼자 먹을 땐 구수했는데, 지하철을 타고 보니 구린내였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추상적 파편에 불과했던 가난이, 타인의 시선을 통해 비로소 구체적 실체를 얻는 것이다. 가난은 언제나 비교를 통해 인식되고, 강해지는 괴물이기 때문이다.

 

3. 가난의 근원-또한 가난은 대물림된다. 그것은 찌그러진 냄비의 밑바닥처럼, 새까맣게 그을린 삶의 궤적을 눌어 붙인 채로 자식들에게 건네진다. 그래서 가난은 눈물겹도록 잔인하다. 그러나 그 대를 끊고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일은 그토록 어렵다. 결국 부를 물려주거나,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정신을 물려주거나 둘 중 하나인 세상인데, 답을 알면서도 그러질 못한다. 왜냐하면 어떤 가난은, 장판과 벽지뿐만 아니라 그 주인의 정신마저도 썩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4. 가난의 분류-그러나 극복하는 가난이 있다. 그것은 ‘가난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가난을 물려주는 것은 중죄다’라는 책임감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갖지 못한 만큼, 더 많이 노력해서 쟁취해야 한다는 현실 인식과 행동의 반영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가난에 직면한 자의 사위는 소란스럽다. 그러나 가난을 직시하는 자의 눈빛은 고요하다. 그는 원망의 눈으로 불평등을 바라보는 대신, 오로지 자신이 감내해야 할 고통의 양만을 바라보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그런 사람을 본 적 있다.

 

5. 가난의 분류 2-반면에 굴복하는 가난은, ‘욜로(You Only Live Once)’라는 무책임함에서 시작해 ‘스리 푸어(카 푸어, 백 푸어, 트래블 푸어)’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가난에 굴복한 그들은 이미 의지를 잃은 지 오래다. 그러나 그 자리를 무언가로 채우고 싶은 욕망만은 뚜렷하다. 그래서 그들은 타인의 삶 앞에 가상의 자신을 내세워 대리자의 삶을 살아간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5만원 원룸에 거주하며 캐피털사 명의의 벤츠를 끌고 유흥가를 질주하는 모습이 진정한 저 자신이라 믿는 자가 있다. 없는 형편에 겨우 모은 여윳돈으로 ‘고생한 나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며 중고 숍에서 구입한 샤넬 백을 인증한 후, 종잣돈이 뭐냐고 반문하는 자가 있다. 대기업을 그만두고 여행 유튜버로 성공한 극소수 사례에 빙의된 채, 신용 대출을 받아 유럽 일주를 다녀오는 자도 있다. 그런 자들이 텅 빈 계좌를 노려보며 나라 탓을 하고, 부모 탓을 하고, 부자 탓을 하며 자신의 가난을 정당화한다. 결국 그들이 감내해야 할 고통의 대부분은 부모가 대신 짊어지거나, 각자 영역에서 충실히 살아온 자들의 세금으로 충당될 것이다.

 

 

6. 가난의 모순-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은 찬양되고 권장된다. 이렇듯 가난은 모든 분노와 증오의 원천이며, 시기와 질투의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적은 언제나 가난이 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가난을 찬양하는 것은 언제나 고결한 인류애의 표출 방식이며, 어느 한쪽의 사상과 이념적 무결성을 논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으므로 가난은 끝까지 그 추악한 아름다움을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언제까지나 위로 대상이고 박애의 상징이며 절절한 아픔이고 고통이므로, 가난은 영원히 세상 속에 남아 그 어떤 극복과 독려의 말들을 거부한 채, 찌그러진 냄비 안에 담겨 그 특유의 구린내를 풍기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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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가난의 활용-그리하여 마침내 가난은 활용되고 있다. 부유한 자들이 가난을 노래하며 더 큰 부를 축적하고, 가난의 필연성 안에 가난한 자들의 가능성을 가둬 넣는다. 가난을 내세워 입신한 어느 젊은 정치인은 화면 터치 몇 번만으로 범접할 수 없는 부의 쾌거를 이루었다. 가난을 신성시함으로써 오히려 모독되기 쉽게 만들고, 가난을 아름답다 말하며 오히려 비참하게 만드는 반작용들이, 이러한 자들이 가진 위선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건재하다. 왜냐하면 어떤 정치는, 초심뿐만 아니라 그 주인의 양심마저 썩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8. 가난의 해제-그러므로 가난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가난은 더러운 것이다. 그것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아는 진실이다.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3/05/23/Y4443KGQWFCHNOQIUT3RXILA4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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