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서는 KAL기 폭파사건(1987년 대선직전 칼기공중폭파, 김현희 대남 공작)이란 것이 있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탔었다면 우연히 일어난 사고라고 보기에는 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탑승자 모두 사망한 대 참사가 발생한 일이다.
아직 사고 원인이나 주변 정황에 대해서 별다른 정보가 없어서 단정짓긴 이르겠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사고가 우연히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로또 복권에 당첨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까? 그것도 폴란드 대통령 부부에게 일어날 확률까지 고려한다면 말이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진상을 정확히 알 수 없는 KAL기 폭파사건을 감안한다면 이 사건 역시 제대로 진상 규명이 되기 어렵지 않을까?
얼마나 이런 비참한 일이 더 발생될까 걱정스럽고, 두려워진다.
추락 현장, "모두 사망해 구급차 부를 이유가 없었다"
폴란드 기자들이 본 여객기 추락 현장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구급차를 부를 이유가 없었다. 모두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10일 오전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 부부 등 97명이 생명을 잃은 러시아 서부 스몰렌스크의 여객기 추락 현장으로 달려간 폴란드 기자 마르신 우지시에체오스키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러시아 방송 R-TV와 인터뷰에서 "우리는 한 시간 먼저 도착해 대통령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면서 "대표단이 그렇게 큰 규모로 꾸려지지 않았다면 우리 대통령 풀기자단도 같은 비행기에 탔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구조팀이 구급차를 부를 이유가 없었음을 금방 알아차렸다. 왜냐면 모두가 사망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사고 현장에 처음 도착한 기자들 중 한 명인 빅토르 바토르는 "너무도 참혹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들이 대통령을 기다리며 카틴 숲 희생자 묘역에 도착해 있을 때 사고소식이 전해졌다. 사고가 나고 3분 정도가 지나 전화를 받았다. 아무도 그 소식을 믿을 수 없었다. 관리들과 어떤 연락도 되지 않았다"면서 사고 직전 상황을 전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곧장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사고 후 20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현장은 아직 (경찰에 의해) 봉쇄되지 않은 상태여서 접근할 수 있었다.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고 말했다. 바토르는 "비행기 잔해들이 수백m에 걸쳐 널려져 있었다.
우리는 사망자들의 시신을 목격했고 신원 파악조차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고 말해 사고 당시 충격을 짐작게 했다.
또 다른 폴란드 기자 바바라 블로다르치크는 "누구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면서 "우연히 필름 편집하는 동료가 현장에 있었고 그가 개인용 카메라로 모든 장면을 찍었다. 비상대책부 직원들이 도착하기도 전이었다"고 전했다.
사고 현장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 등 러시아 관리들이 나와 사고기 잔해 수습과 시신 운구 등을 지휘하고 있다. 푸틴 총리는 "사고 원인을 밝혀내고, 희생자 가족을 돕고, 그들의 정신적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KAL 858기 폭파사건은?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위 "김현희 폭파범 맞지만 당시 정부가 대선에 이용한 것은 분명"
1987년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가던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근해에서 공중 폭발하는 '대형 사건'이 터졌다. 대선을 코 앞에 두고 있던터라 정치권은 물론 전 국민이 '폭발사고'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 안기부(現 국정원의 전신)의 사고조사 결과를 보면 '칼 858기'는 이라크를 출발해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아부다비에 잠시 내린 뒤 다시 다음 기착지인 방콕으로 비행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칼 858기'는 29일 오후 2시쯤 미얀마 벵골만 상공에서 무선보고를 끝으로 소식이 끊겼다.
탑승객은 중동의 기적을 일궈내고 귀국하던 한국인 해외근로자가 대부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한국승객 93명과 외국승객 2명, 승무원 20명 등 모두 115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안기부는 '사고'의 성격과 관련해 "사건발생 15일 만인 12월 13일 양곤 동남쪽 해상에서 공기주입펌프 등이 파손된 칼기 구명보트 등 부유물 7점이 발견됐다"며 "이에 따라 비행 중 폭발에 의한 추락사고"라고 발표했다.
이어 안기부는 "'칼 858기'는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북한 대남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가 김정일의 친필지령을 받고 기내에 두고 내린 시한폭탄과 술로 위장한 '액체폭발물'의해 폭파됐다"고 덧붙였다.
사건의 진상이 공식 발표되자 미국은 즉각 북한을 테러국가로 규정했으며 일본도 북한공무원의 입국을 금지하는 등의 강경 조치를 취했다.
이후 폭파범으로 지목된 김승일과 김현희는 전격 체포됐으나 김승일은 수사기관의 조사 중 '음독 자살'해 숨졌고 김현희는 1987년 12월15일 서울로 압송됐다. 김현희의 압송은 대선을 불과 나흘 앞두고 벌어져 숱한 '억측'들을 쏟아냈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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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올림픽을 앞두고 벌어진 '칼 858기 폭파 사건'으로 국내에는 자연스레 공안정국이 형성됐고 이어진 대선에서 여당에 유리한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정부가 '칼 858기 폭파사건' 수색을 시작한지 10일 만에 조사단을 현지에서 철수시키면서 '의혹'은 불거지기 시작했다.
예를들어 1972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회담에 참석한 남쪽 대표에게 꽃다발을 증정한 소녀가 김현희라고 공개한 사진이 김씨와 다른 인물이라는 의혹이 대표적인 것.
파장이 커져가자 안기부에서 이름을 바꾼 국가정보원은 각종 '조작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당국이 강력하게 부인하면서도 '국가 기밀'을 이유로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않아 의혹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던중 지난 2006년 8월, 결국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가 '칼 858기 폭파사건'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위원회는 지난 87년 11월 미얀마 상공에서 실종된 대한항공기는 당시의 안기부 발표대로 폭탄 테러에 의한 추락으로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또 북한 공작원인 김승일과 김현희가 폭파범이라는 심증을 갖는 데도 무리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다만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위는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을 대선에 이용하기 위해 노력한 점은 분명하며 이와 관련한 정부의 문건과 김현희를 대선 전날까지 압송하려고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사실을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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