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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김창완 조영남 58도 고량주 기울이며 진솔한 대담 이어가 맨 정신으로는 스스로 용서가 안 돼 술 마셔 대한민국 가요사 살아있는 전설 ‘산울..

창(窓)/연예窓

by dobioi 2022. 4. 19.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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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진솔한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건 다행이라 생각한다. 오랜 팬이라 생각했었는데, 그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그나마 오랜 뉴스를 뒤늦게 찾아보며 김창완을 이해하게 됐다.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며, 선물을 받고, 콘서트에 가보곤 했는데, 정작 김창완 가수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것을 알지는 못했던 것 같고, 지금 쭉 대화를 통해 이해하는 김창완에 대해 측은지심도 갖게 되고, 이해도 하게 된다.

 

이런 대담이 남아있다는 것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예스럽기도 하고, 아날로그 감성 같기도 하고, 정작 중앙일보 홈페이지에는 링크가 잘못되어 이미지가 없어졌지만, 어떤 분의 블로그에서 그나마 이미지 링크를 참고할 수 있어서 사진까지 거의 온전한 상태로 만들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듣고 들어온 앨범을 김창완은 죽으면 무덤에 넣고 싶다고 해서, 가수와 팬의 입장과 느낌이 다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자전거를 타는 이유가 건강을 위해서라는데, 10여년이 지나도록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는 걸로 봐서, 건강이 잘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아 팬으로서 다행스럽다. 삼촌같은 김창완 아저씨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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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중앙일보

업데이트 2009.01.29 13:59

 

 

 

월간중앙 1977년 <아니 벌써>로 등장해 1997년 13집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까지 음반 13장과 <개구쟁이>를 비롯한 동요집 4장을 낸 김창완·창훈·창익 3형제로 구성된 록밴드 ‘산울림’의 맏형 김창완. 그러나 그는 언제부터인가 가수보다 탤런트로 더 익숙해졌다.

 

산울림이 밴드로 활동한 시기가 1977년부터 1982년까지 4년 남짓에 불과하기 때문. 멤버들이 연기자로, 회사원으로, 식료품점 사장으로 생계를 위해 개점휴업한 동안 산울림은 “산울림 때문에 음악을 하게 됐다”는 후배 가수들이 나올 정도로 대한민국 가요계의 전설이 됐다.

 

산울림의 개점휴업 상태에 대해 언제나 “산울림은 현재진행형이다. 정리하려면 앞으로 20년은 걸릴 것”이라던 맏형 김창완이 지난 연말 산울림의 종말을 선언하고 ‘김창완밴드’ 시대를 선언했다. 막내 김창익이 지난해 1월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55세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지난 연말 홍익대에서 스탠딩콘서트를 열며 “앞으로 목숨 걸고 음악을 하겠다”고 선언한 김창완을 조영남이 서울 방배동 김창완의 집 근처의 한 중국음식점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각각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40년, 30년씩 버틴 거목들이지만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 만큼 둘은 작정한 듯 58도짜리 고량주 두 병을 앉은 자리에서 비웠다.

 

김창완 형, 지금 어디서 오시는 거예요?

 

조영남 방송 끝나고 여의도에서. 아이구~. 그런데 이렇게 밥 먹으라고? 너무 어색하다. 나는 이런 거 싫어. 너는 이런 거 짜증 안 나?

 

김창완 나는 신경 안 써. 왜 그런 걸 신경 써?

 

조영남 (깜짝 놀라며) 너, 의외로 뻔뻔하구나. 나도 그래야 하는데….

 

김창완 형, 그렇게 살 필요 없어요.

 

조영남 응?

 

김창완 그건, 형이 모든 걸 다 작품으로 봐서 그래. 형, 그냥 편안하게 살아.

 

조영남 내가 까다로운 건가? 어쨌든, 술 한잔 하자.

 

김창완 좋죠. 막걸리 어때요? 이 근처에 막걸리 ‘죽이는’ 데 있는데. 진짜 후회 없는….

 

조영남 막걸리가 죽여봤자지. 여기는 중국집이야. 일단, 여기서 한 잔씩만 하고, 밥 먹고 그쪽으로 옮기자. 내가 김창완을 만나서, 너 죽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이 너와 술 한잔 해보는 거밖에 더 있냐? 네가 (주종을) 골라봐. 오늘은 너한테 권리가 있어.

 

김창완 그래?

 

한참 메뉴판을 살피던 김창완이 58도짜리 고량주 한 병을 시킨다. 주문을 마치자 조영남이 정색하며 가요계의 소문난 주당인 김창완한테 묻는다.

 

조영남 그런데, 너는 술 마시는 게 지겹지도 않냐?

 

김창완 아침에는 지겨워요. 그런데, 밤에는 안 지겹지.

 

데뷔 시절의 산울림밴드.

 

“맨 정신으로는 스스로 용서가 안 돼 술 마셔”

 

조영남 지금 술로 끝까지 버티는 사람은 너와 민기뿐이야. 오태석·이윤기가 끝까지 버티다 얼마 전에 물러났고. 전유성도 일시 ‘스톱’했어. 위에서 피가 나온대. 내가 아는 한 끝까지 술 마시다 죽을 놈이 너 같아.

 

김창완 (허허 웃으며) 지금 나 오래 살라고 악담하는 거지?

 

조영남 그래도 내가 너 자전거 타고 다니는 거 보며, 현명하다 싶었지. 매일 아침 자전거 타고 출근한다며?

 

김창완 하하하. 그런데 (자전거를) 술 마시기 위해 타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도 도움이 되기는 해요.

 

조영남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지.

 

김창완 그런데 담배가 더 중요해요. 진짜야. 나는 담배 근처에도 안 가는데, 요즘 클럽에서, 담배 피우는 데서 공연하다 보면 정말 죽겠어.

 

조영남 죽지, 죽어. 나는 누가 담배 한 대만 피워도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나가. 내가 중국 아티스트들이 그렇게 초대해도 왜 안 가는지 알아? 담배 때문이야. 중국 사람들은 아직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우잖아. 일일이 피우지 말라고 하기는 구차하니 아예 내가 중국을 안 가지. (이때 주문한 술이 왔다) 술은 ‘오케이’지, ‘오케이’야.

 

김창완 (일어서서) 제가 한잔 따르겠습니다.

 

조영남 건배사는 내가 할게. 영어로 해도 되나?

 

김창완 마음대로 하세요.

 

조영남 짧게 영어로. 원샷!

 

김창완 그게 건배사예요? 하하.

 

김창완이 원샷을 한 뒤 일어서서 잔을 머리에 털어 보인다. 둘은 이렇게 고량주 석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금세 비웠다. 얼굴이 벌개진 조영남이 묻는다.

 

조영남 야… 내가 여자한테 약하잖니. 너는 어떠냐?

 

김창완 저도 약해요.

 

조영남 너는 그래도 착한 구석이 있어. 여자들을 막 바꿔가면서 희한하게 유혹하지는 않잖아. 그렇지? 하고 싶은데 너는 안 하는 거지? 근데 그게 안되니까 술을 마시는 거지?

 

김창완 (크게) 하하하. 그건 아니에요. 술은, 술을 마시면 내가 조금 용서가 돼요.

 

조영남 설명해봐.

 

김창완 음주가 실제로 자아도취를 시켜요. 음주의 자아도취 5단계라고 들어보셨어요? 일단, 1단계가 “나는 똑똑해”예요.

 

조영남 술을 마시면 자기 긍지가 생기는 것이구나.

 

김창완 그렇죠. 2단계가 “나는 매력 있어”예요. 그래서 술에 취하면 막 남들한테 술을 권하는 용기가 생기는 거죠. 3단계는 “나는 부자다”예요. 술을 마시면 마구 지갑을 열게 되죠. 그러고는 아침에 속 쓰려 하죠.

 

조영남 하하하. 그렇지.

 

김창완 4단계가 재미있어요. 뭐냐? 천하무적 단계. 싸움질하는 거죠. 5단계는 형도 많이 하셨을 거예요. 투명인간 단계. 내가 하는 걸 다른 사람은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남들한테 막 강요하고 뺑소니치고 하는 사건이 나는 거죠. 저는 3단계까지는 괜찮다고 봐요.

 

남들한테 폐는 안 끼치니까. 평상시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를 구박하고 살아요? 그런데 술 한잔 마시고 나면 그래도 내가 좀 괜찮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잖아요. 맨 정신으로는 암만 자기를 용서하려고 해도 안 되니까…. 그런데 그게 술 한잔 딱 하면, 아이 괜찮아~ 나는 똘똘해, 나는 매력 있어, 이렇게 된다니까.

 

요즘 10대들은 김창완을 마음씨 좋은 옆집 아저씨 인상을 가진 탤런트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가요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를 ‘살아있는 전설’로 부른다. 남진·나훈아가 라이벌을 형성하며 인기 절정을 구가하던 1977년, 김창완·창훈·창익 3형제는 록을 들고 나와 당시 성인가요 중심의 한국 대중가요 판을 뒤흔들었다. 이들 3형제가 음악을 시작한 과정은 간단하다. 1972년 3형제 중 맏이인 김창완이 집으로 기타를 들고 와서 노래를 부른 것이 산울림 탄생의 계기가 됐다.

 

2008년 11월15일 오후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2008 Mnet KM 뮤직 페스티벌’에서 김창완이 후배 가수들과 <개구쟁이>를 열창하고 있다.

 

대한민국 가요사 살아있는 전설 ‘산울림’

 

김창완은 17세에 대학에 입학하며 기타와 처음 대면했다. 그리고 3개월 후 작곡을 시작했다. 이를 어깨너머로 지켜보던 둘째 창훈이 기타를 사서 형과 합류했다. 막내 창익은 전화번호부·노트 등을 방바닥에 늘어놓고 숟가락으로 두드리며 리듬을 타다 드럼을 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음악을 시작한 세 형제는 1집 앨범을 내기 전까지 무려 200여 곡을 썼다. 산울림이 데뷔 후 한 해 2~3회 꼴로 음반을 낼 수 있었던 배경이다. 맏이 김창완이 서울대를 졸업하던 1977년. 3형제는 그 동안 작곡해 뒀던 곡이 아까워 정리하는 기분으로 한 장의 앨범을 내기로 한다. 우여곡절 끝에 잡힌 1집 녹음 날짜가 김창완의 은행 입사시험일과 겹쳐 입사를 포기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음반 하나만 갖고 싶다’는 생각에 낸 1집에 수록된 <아니 벌써><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불꽃놀이> 등은 그야말로 대히트를 했다. 5개월 뒤 이들은 <어느 날 피었네><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등의 곡이 담긴 2집을 발표했고, 같은 해 <나의 마음은 황무지 >가 담긴 3집을 발표했다.

 

조영남 너는 전설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그냥 겸허하게 말해봐.

 

김창완 굉장히 괴로운 지적인데요. 아시다시피 지난해 (막내동생이 사고로 죽는) 변고를 당해 ‘20년 뒤에나 합시다’ 했던 (산울림 정리) 작업을 갑자기 하게 됐어요. 산울림 30주년 기념앨범 작업을 한 것이 불과 지지난해인데…. 제 손으로 그 앨범을 정말 울면서 다시 다 정리했죠. 그런데 그때 앨범 제목을 ‘레전드 오브 산울림’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자연스럽게 나왔어요. 그런데,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싫더라고요.

 

조영남 왜?

 

김창완 (나는) 살아야 하니까. 그런데 (전설이 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니까. 살아 있는 전설이라는 건 아주 궁한 말이잖아?

 

조영남 그렇지.

 

김창완 그래서 전설이라는 말이 너무너무 싫은 거예요. 이건 아니다 싶었지. 그래서 ‘전설(레전드)’을 ‘이야기(스토리)’로 바꿨어요. 그렇게 하자 편해지더라고요. 사실, 우리가 신화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 형태들이 있어요. 일종의 신드롬이죠. 나는 어리석지만, 그래도 내 머리를 딱 쪼개줄 어떤 사람이 있기를 소망하는 거죠. 그런 게 세상에 천재를 만들고, 전설을 만든다고 봐요. 그런데, 그것을 살아있는 사람한테 붙인다는 것은 그 사람한테는 형벌일 수 있어요. 형님께도 누가 ‘혹시 천재 아니세요’라고 많이 묻지 않아요? 그럼 괴롭지 않아요?

 

조영남 더럽게 괴롭지. 전설이 되기 위해서는 빨리 죽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김창완 저는 전설을 완성하는 게 꼭 죽음은 아니라고 봐요. 저는 전설이 되기 위한 무엇을 지켜야 한다, 이런 건 없어요. 죽음이 전설을 완성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전설이 되기 위해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런 가정은 전설에 대한 독소조항 같아요.

 

조영남 네가 첫 번째 노래를 써서 첫 방송한 게 몇 살 때야?

 

김창완 산울림 만들어 데뷔한 것이 스물세 살 때죠. <아니 벌써>를 쓴 것은 열일곱 살 때이고요.

 

조영남 (깜짝 놀라며) 열일곱 살 때?

 

김창완 네. 동생은 열세 살.

 

조영남 그럼 고등학교 때 <아니 벌써>를 쓴 거야? 와우~. 그럼 창완이가 나나 김민기보다 훨씬 성숙도가 빨랐네. 그 천재 끼가…. 누구한테 배운 것도 아니지?

 

김창완 제가 학교를 남들보다 빨리 들어가서 그때 대학에 막 입학했죠. 누구한테 배우거나 한 적은 없어요. 형도 그랬겠지만, 우리 형제가 데뷔를 염두에 두고 노래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제가 열일곱 살 때부터 기타를 뚝딱거렸는데 6년 만에 첫 앨범이 나왔잖아요. 첫 앨범은 그 전에 만들어 뒀던 노래들을 모아서 낸 거였어요.

 

조영남 네가 무슨 고등학교를 나왔지?

 

김창완 중앙고등학교요.

 

조영남 그리고 열일곱 살에 서울대를 갔나?

 

김창완 네.

 

조영남 이야~. 나는 연예계에서 나만 서울대 출신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중앙고등학교를 나와서 어떻게 서울대에 들어갔냐?

 

김창완 그건 진짜 내가 형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예요. 그때도 보결제도가 있었어?

 

조영남 하하하. 너희 형제의 음악적 재능은 어느 쪽 유전자야? 엄마 쪽이야, 아버지 쪽이야?

 

김창완 모르겠어요. 유전적인 건지, 뭔지도.

 

조영남 <아니 벌써>가 심의에 걸리지 않았던가?

 

김창완 2집에 수록된 모든 곡이 전면 개작이에요. 전면 개작!

 

“1집 40만 장 팔았지만 한 푼도 못 받아”

 

 

조영남 뭐가 심의 대상이었던 거야?

 

김창완 저희 앨범이 전면 개작 명령을 받았던 이유는 퇴폐였어요.

 

조영남 어떤 거?

 

김창완 그때는 술 마시고 노는 걸 풍경으로 그리면 퇴폐라고 했죠. 가령 ‘술 먹고 밤새도록 기타치고 놀자. 놀다 보니 날이 밝았네’라고 하면 ‘날이 밝을 동안 뭐했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건 퇴폐다 판정 내리고. 또 어떤 것은 ‘너무 슬프다. 이건 말이 안 된다’고 하고. 당시 검열, 뭐 이런 식으로 다 있어요.

 

1977년 데뷔한 산울림은 불과 1년 남짓한 기간에 5장의 앨범을 발표한 뒤 김창훈과 김창익이 군에 입대하며 맏이 김창완은 솔로로 방향을 틀었다. 1집만 40만 장 판매한 이들이었지만 1982년 9월 잠정적으로 해체할 때까지 수입은 거의 없었다. 결국 창훈·창익 형제는 제대 후 음악을 접고 취직을 결심하며 밴드는 해체됐다.

 

이후 창훈은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갔고, 창익은 대우자동차에 근무하다 10년 전 캐나다 밴쿠버로 건너가 식품유통회사를 운영했다. 그러다 창익은 지난해 1월30일 직원 대신 직접 지게차를 운전하던 중 사고로 숨졌다.

 

조영남 산울림 활동기간에 순전히 판 팔아 생활한 게 몇 년이나 되나?

 

김창완 하하하. 판 팔아 생활한 적은 한 해도 없어요.

 

조영남 엄살부리는 거 아니고? 당시 스타였는데도?

 

김창완 예. 그러니 (창훈·창익이) 다 떠났잖아요. 한 해라도 판 팔아 살았으면 왜 떠났겠어요? 돈이 얼마나 달콤한데….

 

조영남 왜 그게 불가능했지?

 

김창완 아무런 보호장치가 없었어요. 저작권이 확립돼 있지 않았고. 레코드사와 우리는 계약서도 없었어요. 형님은 계약서 썼었어요?

 

조영남 나도 그런 거 없었지.

 

김창완 그러니 주면 받고, 안 주면 마는 것이고….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어요. 지방에서 공연했는데 개런티를 몇 푼 주더라고요. 그런데 우리가 또 숙맥이어서 그 돈을 받지 못하고 서울 올라가서 달라고 했죠. 그런데, 서울 올라와서 달라니까 안 줘요.

 

조영남 허허.

 

김창완 (씁쓸하게) 그때는 그랬어요. 야만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그런데 지금도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당시 그렇게 계약서도 없고, 검열도 통과해야 하는 좁은 길을 뚫고 나온 것이 산울림 음악인데, 그 음악이 지금의 상업주의가 만들어낸 음악보다 그래도 폭이 훨씬 넓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과 2년 반밖에 활동하지 않았지만 30년이 지나 이렇게 메아리치고 있거든요. 지금 나온 어떤 노래가 우리만큼 생명력을 가질 것 같아요?

 

조영남 너희가 2년 반밖에 활동을 안 했던가?

 

김창완 네. 동생들이 군대 가기 전 1년 반, 군대 갔다 와서 1년 한 것이 산울림 활동의 전부예요. 그리고 20주년, 30주년 기념 공연을 했죠. 그게 다예요.

 

조영남 동생들 이야기 좀 해봐. 어떤 동생들이야? 죽은 동생도 포함해서. 그들도 사회에 대해 불만이 많았나? 아니면 그냥 순응했나?

 

김창완 힘이 없었죠.

 

조영남 힘이 없는 것을 고분고분 불만 없이 인정했나? 그래도 명색이 산울림 멤버인데 회사 직원으로 살아간다는 데 큰 불만이 없었어?

 

김창완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조영남 다행이네. 비뚤게 생각 안 했다니.

 

김창완 불만이 있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생활환경이 안 맞는다고 생각했죠. 일단 벌이가 돼야 하는데, 벌이가 안 됐으니까. 저도 일단 창작에 쓰는 거는 1%도 안 돼요. 그 미약한 기운을 가지고 지금 다시 김창완밴드를 하는 거예요. 제 수입의 99%는 먹고 사는 데 쓰죠. 먹고 살 기초가 안 됐는데 무엇을 할 수 있었겠어요? 지금도 공연하면 다 적자이고, 음반은 전부 ‘카피’로 살 수 있는데! 이런 현실에서 음악을 하라고 하면 그것이 이상한 사람이죠. 내가 지난해 연말 앨범을 내면서 “목숨 걸고 음악 하겠습니다”라고 공공연히 말했어요. 나는 음악이 진짜 좋아요. 그리고 나는 예전 산울림 음악보다 이번에 새로 만든 음악이 더 좋고….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지만.

 

조영남 으음~.

 

 

동생 죽은 뒤 이성에 비판적으로 변해

 

김창완 그리고 내가 꼭 가고 싶은 세상이 있다면, 2008년 1월31일 이전 어느 하루로 돌아가고 싶어요. 정말 그날 이후 세상이 흑백으로 바뀌었어요. ‘컬러’가 싹 빠진 것 같아요.

 

조영남 ‘컬러’가 싹 빠졌다고?

 

김창완 예. 세상이 그냥 ‘모노 톤’이 돼버린 거야. 형이 그리는 화투 그림에서 색이 싹 빠지고 흑백 처리됐다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황당한가. 막내가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이 내게는 그렇게 달라요. 진짜 그래요.

 

조영남 멀리 있었는데도 그 정도야?

 

김창완 아, 그건 달라요. 저도 몰랐어요. 제 1~2년 전 인터뷰 기사만 찾아봐도 그것을 알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산울림 이야기가 나오면 제가 그랬거든요. 우리는 늘 그대로 있는데 무엇을 새롭게 하고, 무엇을 정리하느냐고.

 

조영남 그래서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

 

김창완 제가 요즘 공연장에서도 말했는데, 나는 사람의 이성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 됐어요.

 

조영남 무슨 말이야?

 

김창완 가만히 보니 사람이 생각해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삶이 바다면 인간의 정신, 즉 이성은 바다의 바람 같아요.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조영남 그렇다면 김창완한테 신은 무엇이며, 시인은 무엇이냐?

 

김창완 우와~. 형이 그렇게 말하니까 신이랑 시인이 정말 비슷하게 들리네. 시인은, 얼핏 떠오르는 건 사회부적응자인데…. 그런데 내가 아는 동생이 시를 쓰는데, 그 동생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고…. 그렇다고 시인이 전부 투사인 건 아니고…. 말 고르기가 어렵네. 뭐 고르고 싶지도 않지만.

 

조영남 그럼 너는 시인이 되고 싶어? 산울림의 가수가 되고 싶어?

 

김창완 어휴~. 나는 그냥 잘 먹고 잘 살고 싶어.

 

조영남 너는 시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어? 내 마지막 희망은 시인이 한번 돼보는 것이거든.

 

김창완 ‘나중에 시인이 될 거야’ 하는 건 의미 없어. 형이 시인으로 살고 싶다면 지금 시를 쓰면 되는 거예요. 어쩌면 형은 시를 쓰고 싶어서 나한테 지금 그 질문을 하며 괴롭히는지도 몰라.

 

조영남 그럴지도 모르지.

 

김창완 형, 멋있는 인생을 살고 싶지?

 

조영남

 

김창완 하지만, 생각해보면 형이 멋있는 인생에 대해 뭔가 환상이 있을지도 몰라.

 

조영남 환상이 있지.

 

김창완 지금 형이 질문을 너무 어렵게 하는데…. 내가 볼 때는 그것도 그래서인 것 같아.

 

조영남 그럼 ‘시인이 되고 싶으냐 가수가 되고 싶으냐’에 대치되는 질문이 뭐야?

 

김창완 ‘창완아, 너 혹시 요즘 외롭지 않니? 나 너 손잡아본 지 오래 됐다’ 뭐 이런 거지. 아니면, ‘한강에 가끔 나가냐?’ ‘얼음 어는 소리 들어봤어?’ 이런 거. 형 진짜 얼음 어는 소리 들어봤어요?

 

조영남 그게 듣기 싫어서 내 아파트에는 이중 창문으로 유리가 2개씩 있어, 응접실에. 굉장히 비싼 유리로….

 

김창완 하하하. 소음이 절대 안 들어와요?

 

조영남 안 들어오지.

 

김창완 그거 아깝다. 형, 마작 소리 모르지? 얼음 어는 소리가 꼭 마작 부딪치는 소리와 똑같아요. 수많은 얼음 조각이 부딪치면서 아주 몽롱하고 묘한 소리를 만들죠.

 

조영남 (정색을 하고) 쭉 외로웠냐?

 

김창완 그렇죠. 형은 취미생활이 있으니 안 외로울지 모르는데, 나도 자전거를 타기는 하지만, 그게 취미는 아닌 것 같아. 어떻게 보면 형과 나는 외로움에 대한 대처 방법이 전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뭐랄까? 형은 조금 낙천적인 것 같아. 그렇게 느껴져. 아니면, 형이 그렇게 훈련한 것일 수도 있고.

 

조영남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서 너를 구축(構築)해주는 건 뭐야? 나를 구축해주는 것은 하나가 돈벌이이고, 다른 하나가 여자친구들인데.

 

김창완 나는 별로 그런 거 없어요. 사실, 나는 개인이 무엇인가를 구축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아요. 내가 지금 뭔가 하나를 더 쌓기 위해 형과 이 순간 인터뷰하고, 술 마시고 하는 건 아니잖아. 지금 이 순간이 그냥 좋은 거지. 영남이 형과 내가 생전 처음 술 마시는데, 술맛이 이렇게 좋네~. 참, 형은 오후 방송이지? 나는 아침 방송이야. 그래도 나는 형이 오늘 끝까지 가자면 가.

 

조영남 이야~. 오늘 너한테 한 수 배웠다. 지금 무엇을 하든 미래를 구축하려고 했던 내 스스로를 반성했어. 그런데, 네가 구축과 거리가 멀게 살고 있다고 해도, 너는 네가 지금까지 낸 앨범만 모아도 너의 인생이 구축되거든. 나는 앨범이 없으니 공연을 계속해야만 가수라는 내 인생이 구축되는 거고. 냉정하게 말해서 김창완은 이미 앨범으로 구축돼 있다는 거지. 사람들이 산울림을 공연을 보고 좋아하나? 음반을 통해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거지.

 

“연기는 돈 안 주면 안 하고, 노래는 돈 안 줘도 해요”

 

 

김창완 그런데 말이죠. 형, 나는 늘 내가 죽으면 내 판을 다 함께 땅에 묻어달라고 말해요.

 

조영남 왜?

 

김창완 저작권이 얼마 전에 몇 십 년 또 늘었다는데, 나는 그게 큰 의미가 없다는 거죠. 나는 내가 죽으면 내 노래가 다 끝났으면 좋겠어요.

 

조영남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김창완 예.

 

조영남 김창완을 실제로 눈으로 보면서 귀로 듣는 게 판으로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김창완 그럼요. 판은 아무 것도 아니죠.

 

조영남 음악 안 할 때는 뭐 하냐? 나는 일상의 9할에는 음악이 없거든. 1할만 음악이 차지하고 나머지 시간은 딴 짓 하지.

 

김창완 저요? 저는 항상 음악을 해요.

 

조영남 (깜짝 놀라며) 음악 안 할 때는 없어? 그럼 제일 재미있는 일은 뭐야?

 

김창완 제일 재미있는 건 공연!

 

조영남 오~ 그래? 공연이 재미있다는 말이야?

 

김창완 그럼요. 최고로 재미있어요.

 

조영남 연기는? 요즘 보면, 가수인지 탤런트인지 구분이 안 되게 연기도 잘하던데.

 

김창완 그런 질문 많이 받는데, 연기는 돈 안 주면 안 하고, 노래는 돈 안 줘도 해요. 그게 진짜 차이예요.

 

1985년 MBC 드라마 <바다의 노래>에서 수철 역으로 연기를 시작한 김창완은 20여 년간 1년에 많게는 세 편, 적어도 한두 편씩은 꾸준히 드라마에 출연했다. 그가 출연한 영화만 4편에 달한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간 그가 단골로 맡았던 역은 마음씨 좋은 옆집 아저씨 역 또는 애 딸린 홀아비 역. 근래 <하얀거탑>에서는 냉정하고 교활한 의사 우용길,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시청률에 연연하는 중년 CP, <일지매>에서는 인자한 얼굴 뒤로 온갖 음모를 꾸미는 음험한 폭군 등을 연기하며 연기자로서도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조영남 그런데, 왜 오랜 시간 중년의 아저씨만 연기했지?

 

김창완 그런 역이 들어올 때, 나는 내 음악을 검열하던 시절처럼 안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은 내가 작품을 고르는 줄 아는데, 나는 전혀 작품을 고르지 않아요. 어떤 감독이 하자고 하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배역에 대해 물어보지도 않고 한다고 해요. 어떤 감독도 상관 없어요. 그냥 나와 같이하고 싶어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좋죠. 또 생각해보면, 오랫동안 제가 반복된 캐릭터에서 내 속 깊이 있는 일상성을 보여줬기 때문에 최근에 성격 있는 역할을 맡았을 때 차별화돼 보이기 시작한 것 같기도 하고요.”

 

“무신론자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조영남 종교는 어떻게 되냐?

 

김창완 종교요?

 

조영남

 

김창완 얼마 전에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었는데, ‘내가 하는 고민을 나 혼자 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조영남 그게 너의 신에 대한 ‘스탠스’와 무슨 관련이 있지?

 

김창완 꼭 대답해야 해요?

 

조영남 대답하기 싫으면, 싫은 이유를 설명해도 되고.

 

김창완 오케이. 저는 종교가 아주 특이한 현상 같이 이해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아요. 종교가 신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라는 걸 설명할 수 있다면 내일이라도 믿겠지만-.

 

조영남 그게, 네가 무신론자라는 말이야?

 

김창완 예. 저는 (신을) 안 믿어요.

 

조영남 그럼 그렇다고 하지, 왜 그렇게 뜸을 들여? 그 이야기를 하는 게 겁나는 거야?

 

김창완 형, 무신론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조영남 허허.

 

김창완 희은이 누나랑 형님이 저번에 종교 이야기 하며 싸웠다며. 오늘은 쓸데없이 종교 이야기하다 싸우지 맙시다.

 

조영남 평소 자주 화를 내냐? 화가 나면 어떻게 하냐?

 

김창완 사람들이 진짜 화나면 막 욕하잖아요. 나는 진짜 화나면 (목소리를 낮게 깔며) “이 사람이~”라고 해. 형은? 형도 막 욕해요?

 

조영남 나는 욱하지! 너무 욱해서 뒤를 못 보지. 너하고 달라.

 

김창완 하하… 형 지금 나이가 몇이에요?

 

조영남 (멋쩍은 듯) 네가 나를 한탄하기에는 이미 늦었어.

 

김창완 형도 알겠지만 내가 가수냐, 탤런트냐는 질문을 많이 받잖아. 그럼 나는 가수라고 답하거든. 그런데, 내 스스로 나를 가수라고 부를 때까지 데뷔하고 한 10년 세월이 걸렸던 것 같아. 형도 나만큼은 아니지만 이것저것 많이 하는데, 그래도 형 안에 꿈틀대는 원형은 가수 아냐? 화가니, 화수(畵手)니, 해도 대중적 의미에서 ‘가수 조영남’을 떼어버릴 수 없잖아?

 

조영남 그렇지. 그런데, 그 말을 지금 왜 하는 거야?

 

김창완 그냥 내가 보는 형님을 말씀 드리는 거예요. 형은 끝까지 가수 표딱지를 뗄 수 없다는…. 그리고 그 동안 형이 얼마나 운명을 거부하고 있는지를요. 그리고 선배도 운동 좀 하세요. 집에서 강변도 가까운데, 거기만 왔다갔다 해도 오래 사실 거예요.

 

조영남 이미 오래 살았어.

 

김창완 내 친구가 지난 달 19일에 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됐어요. 진짜 기막히더라고요. 평소에 건강했는데-. 완전 형하고 똑같았어요.

 

조영남 우리 아버지가 그랬어.

 

김창완 진짜예요?

 

조영남 응, 13년을 반신불수로 누워계시다 돌아가셨지.

 

김창완 13년요? 에휴~. 그럼 자식들 불효하기 전에 돌아가신 거죠. 긴 병에 효자 없다는 건 아시죠? 우리 아버지는 몇 년을 누워 계신지 알아요?

 

조영남 우리 아버지보다 더 오래야?

 

김창완 28년.

 

조영남 이야~. 나는 내가 기록인 줄 알았다.

 

김창완 형, 기록은 깨지라고 있는 거예요.

 

조영남 깨져도 너무 형편없이 깨졌다. 어머니께서 28년 동안 아버지 옆에 계셨냐?

 

김창완 그럼요. 그래서 지금까지 복을 받아 천수를 누리시죠.

 

조영남 나는 정식으로 여자 둘을 만났잖아. 그런데, 너는 하나잖아. 권투의 체급으로 치면, 내가 중량급이라면 너는 라이트급인데-.

 

김창완 하하하. 그런데 말이야, 형. 내가 볼 때는, 형도 미들급 아래야.

 

조영남 (뒤통수를 맞은 표정) 허허. 아무튼 내 질문이 뭔가 하면, 몽타주로만 보면 네가 나보다 훨씬 유리한테 스코어가 왜 그렇게 단조로우냐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종교문제보다 더 풀기 어려웠던 여자 문제를 너는 어떻게 경영하고 살았느냐는 거야. 내 말은.

 

김창완 내가 지금까지 주례를 몇 번 섰는지 알아요? 내가 주례를 설 때마다 하는 말이 “결혼은 제정신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예요.

 

조영남 하하하. 너 지금 나한테 주례가 들어온다고 자랑하는 거냐? 나한테는 주례가 안 들어와.

 

김창완 하하하. 나는 이게 자랑인 줄 몰랐는데, 형 앞에서 말하니까 자랑이 되네. 하기는, 누가 형한테 주례 서 달라고 하겠어요, 미쳤어요?

 

“너는 너무 바르게 살았어”

 

조영남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너는 그런 점에서 내가 볼 때는 불만스러울 정도로 정상적으로 살았다는 말이야.

 

김창완 그렇지도 않아요.

 

조영남 검찰에 끌려가 조사받은 적도 없잖아? 간통죄로 들어간 적도 없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도 없고. 너 정도면 그런 거 한 번쯤 해봤어야 하는 거 아냐?

 

김창완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는 강요된 부채감 같은 게 있었어. ‘강요됨’이 중요한데-.

 

조영남 누가 강요했다는 거야?

 

김창완 모든 사람이.

 

조영남 마지막 질문! 너 죽으면 장례식을 어떻게 해줄까? 그냥 화장해서 뿌렸으면 좋겠어?

 

김창완 형, 그런 건 그냥 애들한테 맡겨요. 무슨 걱정을 그렇게 싸 짊어지고 살아. 길에서 죽으면 나라에서 다 정리해줘.

 

조영남 하하하.

 

김창완 나 고해성사 하나만 할게. 나는 사실 영남이형 미워했어. 내가 볼 때, 형은 뭐랄까 조금 갇혀 사는 것 같았거든. 항상 자유를 갈구하면서, 몸은 그렇게 살고자 하면서도 그렇지 못하는…. 사실 내가 형의 이력이나 살아온 자취에 대해 잘 몰라요. 단지 너무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했던 학생이 너무 젊은 나이에 스타덤에 오른 것 같아 안타까워했지. 왜냐하면, 나는 형이 부르는 노래가 탐탁지 않았거든. 그런데, 오늘 형을 만나니 너무 좋네. 형이 안 늙은 것 같아 진짜 좋고 기뻐.

 

오효림 기자

 

 

 

“전설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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