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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완 아니 벌써, 한국적 록 띄운 지 35년 산울림에 백기 투항했다 막내(김창익)를 가슴에 묻고 나선 산울림을 절대 훼손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죠 산울림을 새롭게 복원하는 것

창(窓)/연예窓

by dobioi 2022. 5. 1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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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울림을 추억하는 것은 기쁘다. 없어져버린 것도 아닌데, 다시 돌이킬 수도 없는데, 그 음악을 잊을 수 없고, 듣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머리 속에서 가사가 맴돌고, 리듬이 떠오르는 것은 팬이기도 하지만 산울림과 함께 자라왔기 때문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본다.

 

오래된 기사를 찾아보는 것은 얻어걸린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그 때 당시에 있었던 일을 일부분이라도 전해들을 수 있어서 좋고, 회포라도 조금 풀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기분을 받게 된다.

 

매일 듣는 라디오에서의 디제잉은 그런 의미에서는 현재진행형으로 깔고 있는 것 같다. 날것같은 김창완을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이라 그런 것이고, 그런 곳이 있어서 너무 좋다.

 

드라마는 물론이고, 인상깊은 짤이 돌아다니는 건 덤이라 생각한다. 영화에서의 어색한 듯, 아주 리얼같은 연기를 보면서도, 미친 김창완의 일면을 보는 것 같아 재밌었고, 노래를 들으면서도 미친 예술가의 노래라, 연주라 신나서 같이 미쳐버렸다.

 

테레비에, 드라마에, 음악방송에, 다양한 매체에서 만나왔던 김창완과, 테이프, CD, MP3로 듣는 산울림과 김창완은 일반인에게 예술을 전해주는 매개체, 추억이다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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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완…아니 벌써, 한국적 록 띄운 지 35년

중앙일보

업데이트 2011.09.08 10:29

 

산울림은 벼락이었다. 1977년, 한국 대중음악계에 느닷없이 내리꽂힌 그 벼락은 우렁찼다. 김창완(57)·창훈(55)·창익(사망) 3형제가 풀어놓은 낯선 음악을 제대로 풀이하기란 쉽지 않았다.

 

‘아니 벌써’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 등으로 이어져 온 산울림표 음악은 전복적이면서도 토속적이었다. 그간의 밴드들이 미국 언어로 미국 음악을 흉내내고 있었다면, 산울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국어로 한국의 록을 연주하는 팀이 탄생했다.

 

그 산울림이 올해로 데뷔 35년째다. 아니, 이 말은 틀렸다. 산울림의 울림은 이미 3년 전 멈췄으므로. 2008년 초 막내 창익이 캐나다에서 벼락 같은 죽음을 맞이하면서 산울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맏형 김창완은 “다시는 산울림의 이름으로 음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곤 김창완밴드를 새로 꾸렸다. 김창완은 지난 3년간 자신의 밴드를 통해 산울림으로부터 달아나려는 시도를 해왔다. 부러 더 강렬하게, 괜히 더 낯설게 음악을 재조립했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산울림은, 말하자면, 그에게 피부가 돼버린 옷이었다.

 

 

산울림이 데뷔 35년째를 맞이한 올해, 그가 털어놨다. “산울림에 백기 투항했다.” 최근 김창완밴드가 내놓은 EP ‘단 잇(Darn It)’을 들어보니 알겠다. 김창완은 옛 산울림의 음악과의 행복한 화학작용을 꿈꾸는 중이다.

 

“세월이 이토록 가볍단 말인가….”

 

그가 피식 웃었다. “산울림 35주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라고 물었더니 먼 곳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지난 3년간 그는 ‘김창완=산울림’이란 등식으로부터 달아나고자 애썼다. 김창완밴드를 새로 꾸린 다음, 전에 볼 수 없었던 화끈하고 강렬한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꿈이었다. 이제야 그걸 알게 됐다.

 

“막내(김창익)를 가슴에 묻고 나선 산울림을 절대 훼손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죠.”

 

2008년 초, 막내가 캐나다에서 불의의 사고로 숨지자 그는 모든 게 허망해졌다. 그래서 3형제가 함께했던 산울림만큼은 원형 그대로 보존하겠다고 생각했다. 산울림의 음악시계를 그 시점에서 딱 멈추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3년간 그렇게 달아나려고 했는데 결국 산울림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그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전화기에 ‘하늘나라’라는 사진 폴더가 있다. 막내의 생전 사진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는 곳이다. 막내 창익의 사진을 몇 장 넘기면서 그가 말했다.

 

“막내를 떠나보내기 힘든 만큼 산울림으로부터 달아나는 것도 힘든 것 같아요. 김창완이란 사람에게 산울림이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다 보니까…. 이젠 산울림에 두 손 들었습니다.”

 

그렇게 최근 내놓은 앨범이 ‘단 잇(Darn It)’이다. 모두 여섯 곡이 수록된 이 앨범은 김창완밴드의 날카로움과 산울림의 서정성이 상호 삼투한 음반이다. 이를테면 김창완이 홀로 기타를 연주하며 부르는 ‘녹슨 자전거’는 옛 산울림의 향취가 그대로 묻어난다. ‘회상’ ‘청춘’ ‘독백’ 등 산울림식 발라드와 살을 맞대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산울림과 김창완밴드가 비로소 제대로 된 화학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뿐이 아니다. 김창완 특유의 사회비판적 목소리도 여전히 드세다. 예컨대 타이틀곡 ‘단 잇’은 이렇게 시작한다.

 

‘학교를 다니고 학원을 다니고/ 대학을 나오고 직장엘 다녀도/ 아무것도 모르겠네 정말 모르겠네… 언제 내가 어른이 돼버린 걸까. 차라리 내가 사라져버리면 어떨까…’.

 

 

-‘단 잇’은 강렬한 리듬에 세상을 호통치는 듯한 가사가 인상적인데요.

 

앨범 ‘단 잇(Darn It)’

 

“비판적인 목소리라기보다 세상을 희화화하는 노래예요. 어른이 됐으면서도 세상의 중요하고도 현실도피적인 우리들의 자화상이에요. 나약하고 무책임한 어른들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거죠.”

 

사실 데뷔 35주년이면 우리 가요계에 그만한 어른도 없다. 그리고 그처럼 책임감이 뚜렷한 어른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를테면 “산울림 35주년이…” 하고 말을 꺼낼 때마다 그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 후배들이…” 하면서 말을 막았다. 사실 그의 후배 사랑은 유난하기로 유명하다. 요즘도 그가 서울 홍익대 인근에서 크라잉넛·장기하와얼굴들 등 후배 밴드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술을 마시고 있는 장면이 종종 목격되곤 한다.

 

-후배 밴드들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드세요.

 

“후…. 마음이 아리죠 뭐. 음악 하는 후배들이 참 곤궁합니다. 우리 어른들이 그렇게 만든 겁니다. 음악시장을 얼른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려 놓아야 해요.”

 

-사실 요즘 앨범 판매만으로 생존할 수 있는 밴드는 거의 없는 것 같아요.

 

“후배들에게 꼭 말하고 싶어요. 앨범 적게 팔린 게 절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수치스러운 사람은 오히려 소비자들이죠. 정식 앨범은 외면하고 불법 다운로드를 하는 그런 소비자들 말입니다. 앨범을 낸 뮤지션들은 수치스러운 일을 한 게 하나도 없어요.”

 

이번 앨범에서 김창완이 가장 많은 공을 들인 건 마지막 트랙 ‘아리랑’이다. 데뷔 35년 만에 처음으로 연주곡으로 빚어냈다. 12줄 기타가 중심을 잡고 베이스가 징소리를 내는, 지금껏 시도된 적 없는 원형 그대로의 ‘아리랑’을 연주했다는 평을 받는다. 익숙한 ‘아리랑’의 멜로디가 드넓은 초원에서 바람에 실려 울려퍼지는 듯하다.

 

-‘아리랑’은 너무 익숙해서 도전하기 쉽지 않은 곡일 텐데요.

 

“1년 반 넘게 구상한 작업이에요. 아리랑이 맨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정서를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처음엔 이상하게 손만 대면 망가지는 듯했어요. 그래서 원형을 떠올렸어요. 고대에 우리 조상들이 아리랑을 맨 처음 부르고 연주할 때의 모습을 상상했죠. 악기를 우리 전통 악기 다루듯 튜닝했더니 그 음이 나오더라고요.”

 

-35년간 올곧게 밴드 음악을 지켜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뭘까요.

 

“처음에 음악을 해야겠다는 의지로 시작한 게 아니에요. 그저 가장 즐거운 게 음악이었기 때문이었죠. 음악이 나에게 뭘 해줄까 기대했으면 벌써 관뒀을 거예요. 음악이 나에게 술 한 번 산 적이 없기 때문에 여기까지 흘러온 것 같습니다.”

 

[시시콜콜] 대학가요제 놓친 사연

 

1위로 너끈히 예선 통과했지만, 김창완이 졸업생이라 자격 상실

 

산울림은 ‘전설’이다. 말이 군색해서 습관처럼 붙이는 수식어가 아니다. 한국 음악계에서 이 수식어에 반기를 들 이는 아무도 없을 테다. 35년 전 등장한 이 토속 밴드는 한국 록 음악사의 줄기를 뒤바꾸었다. 이들의 구어체 노랫말과 한국적인 록 멜로디 등은 그간 서구 밴드 중심으로 진행되던 한국 록의 역사에 충격파를 던졌다. ‘전설’의 밴드인 만큼 산울림에 얽힌 일화도 많다. 김창완·창훈·창익 3형제는 본래 ‘무이(無異)’라는 팀으로 1977년 열린 제1회 대학가요제에 출전했다. 음악적 재능이 출중했던 이들은 1위의 성적으로 너끈히 예선을 통과했지만 돌발변수가 생겼다. 맏형인 김창완이 대학 졸업생이라는 게 문제가 됐다. 사실 은행에 입사할 생각이었던 김창완은 입사 시험을 포기하고, 이미 만들어뒀던 150여 곡 가운데 일부로 음반을 발표했다. 그게 산울림의 데뷔 앨범 ‘아니 벌써’다. 파격적인 노랫말 때문에 곤욕도 자주 치렀다.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창문 밖이 훤하게 밝았네’로 시작하는 ‘아니 벌써’가 대표적이다. 이 노래는 사실 술 마시며 밤새워 놀고 난 뒤의 아침 풍경을 묘사한 것인데, 음반 사전 심의에 걸려 희망찬 메시지로 탈바꿈했다. 김창완은 “존재하는 가치는 파괴돼도 된다”고 말한다. 그런 가치 전복의 정신이 산울림 음악에 깔려 있다. 그 지점에서 산울림의 예술성이 솟아난다. 후배 밴드들이 산울림을 모범답안처럼 여기며 음악을 익혀온 이유다. 산울림 35주년을 맞아 크라잉넛·이적·장기하와얼굴들 등이 참여하는 헌정앨범 ‘리본(Reborn) 산울림’이 제작 중이다. 김창완은 “헌정이 아니라 산울림 재해석으로 받아들일 생각이다. 산울림을 새롭게 복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글=정강현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김창완은…

 

출생: 1954년 2월 22일

데뷔: 1977년 록 밴드 산울림, ‘아니 벌써’

 

▶산울림 주요앨범:

 

-‘한 낮의 모래시계’(1979)

-‘새야 날아’(1982)

-‘너의 의미’(1984)

-‘꿈꾸는 공원’(1991)

-‘무지개’(1997)

 

▶김창완밴드 주요 앨범:

 

-‘The Happiest’(2008)

-‘Darn It’(2011)

 

 

김창완…아니 벌써, 한국적 록 띄운 지 35년

산울림은 벼락이었다. 1977년, 한국 대중음악계에 느닷없이 내리꽂힌 그 벼락은 우렁찼다. 김창완(57)·창훈(55)·창익(사망) 3형제가 풀어놓은 낯선 음악을 제대로 풀이하기란 쉽지 않았다.‘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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