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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보수·진보집회 15건 서울 기동대 전원 대응 나갔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휴무와 외국 공관 등에 배치 뺀 전 기동대원이투입 좌파 촛불승리전환행동 우파 성향 신자유연대의 집회

시사窓/사회

by dobioi 2022. 11. 4.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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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사건이고 참사다. 이런 일이 없어지기를 바랄 따름이다.

 

하지만 참사 이후의 상황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다. 원인을 찾으려면 모든 것이 원인이 될 수 있고, 결국 살아있는 것이 원인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실과 오가는 말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이상한 세상으로 변하는 것이 당황스럽다. 누가 누거를 비판할 수 있을까 셒은데,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말을 하고 있어서 불쾌하다.

 

얼마나 많은 원인이 나올 것이며, 그것을 장치권에서 받아서 비판하겠나, 싸우겠나 생각하면 불쾌가 치밀어오른다.

 

그날 보수·진보집회 15건… 서울 기동대 전원 대응 나갔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김승현 기자

입력 2022.11.04 03:00

 

‘이태원 핼러윈 참사’가 발생한 지난달 29일, 서울 도심권(종로ㆍ남대문ㆍ용산) 곳곳에서는 좌파·우파 성향 단체의 대규모 집회 4건 등 총 15건의 집회 및 시위가 열렸다. 참사 발생 1시간 15분쯤 전까지 집회·시위가 이어졌다. 이날 서울경찰청은 각 집회·시위에 대응하느라 서울 전역의 모든 기동대 3540명을 동원하고도 모자라 경기남부청 등 지방경찰청에 있는 기동대 480명을 추가로 투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참사가 발생하기 전 이태원 상황이 알려졌다면 기동대 인원을 별도로 빼서 핼러윈으로 인파가 몰리는 곳에 배치할 수 있었지만, 용산서가 현장 상황을 상부에도 제대로 보고하지 않으면서 경찰은 오후 9시 참사 직전까지도 충돌로 인해 인명 피해가 날 수도 있는 집회 대응에 주력했던 셈이다.

 

지난달 29일 이태원 압사 사고가 발생하기 직전 촛불행동이 청계천에서 삼각지역으로 행진하는 모습. 수많은 경찰이 시위 통제에 투입돼 있다. /독자 제공

 

경찰에 따르면, 이날 1000명(이하 참여 인원은 경찰 추산)이 넘는 인원이 참여한 집회는 한국노총·민주노총 공동대책위원회, 촛불승리전환행동, 자유통일당, 신자유연대 등 총 4건이었다. 양대 노총 집회에 2만5000여 명이 몰리는 등 4개 집회 참여 인원은 총 4만명에 달한다. 이 외에도 종로와 남대문, 용산 일대(영등포·강동 제외)에서 진행된 크고 작은 집회들이 11건 있었다.

 

경찰은 이날 도심권 집회에 대비하려 오전 9시부터 서울지방경찰청 전체 기동대 부대 59개를 투입했다. 휴무와 외국 공관 등에 배치되는 이들을 뺀 전 기동대원이 투입됐다. 그럼에도 기동대 부족이 예상되자 서울청은 지방경찰청에 요청해 8개 부대를 추가로 투입했다. 기동대는 집회 현장의 물리적 충돌을 막고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한다. 경찰이 가장 우려한 건 좌파 성향 단체인 촛불승리전환행동(촛불행동)과 우파 성향 단체인 신자유연대의 집회였다. 반대 성향 단체인 이들은 이날 대통령실이 있는 지하철 삼각지역 부근에 오후 9시까지 집회·행진을 했는데, 경찰은 사전에 이들의 충돌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이 때문에 경찰 일각에서는 “집회 대응을 하느라 당시 많은 인파를 예상했으면서도 따로 기동대를 배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란 반응이 나온다. 실제 참사 당일 현장을 지휘했던 용산서 소속 경찰관은 사건 발생 2시간쯤 전인 오후 7시 30분에서 8시 사이에 “이태원 쪽에서 교통 관리가 필요하니 집회 현장에서 교통기동대 20명을 빼서 미리 배치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그러나 용산서 관계자는 “아직까지 집회가 끝나지 않았다”며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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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과적으로 참사가 일어나면서 이 판단은 잘못된 것이 됐다. 경찰 내부에서도 이태원 현장 상황이 제때 제대로 보고돼 지휘부에 전달됐다면, 참사를 피하거나 피해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반응이 많다. 우려했던 집회는 오후 9시쯤 큰 사고 없이 마무리됐고 교통기동대 20명은 집회 후 이태원 일대에 오후 9시 30분쯤 배치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파에 비해 경찰 숫자는 현저히 부족해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용산 대통령실 인근에서 대기하던 기동대 1개를 비롯해 광화문, 여의도 등 기동대들이 잇따라 현장에 도착한 것도 오후 11시20~30분 이후로 참사 발생 1시간여 뒤부터였다.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2/11/04/2IQ35JOBLZCFLKSQBZSWHWVXX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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