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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50주기]"오빠가 분노한 노동현실, 지금도 똑같다"전태일, 휴일엔 동생들과 놀아주던 다정한 오빠 돈가방 들고 온 안기부 50년이 지났지만 노동 사각지대는 더 심각해

시사窓/정치

by dobioi 2020. 11. 12.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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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들이 이렇게 지내고 계시는지 생각도 못했다. 아마도 그쪽에는 관심없는 시대를 살아서 그런가보다.

 

어쨌든 문대통령도 나서서 훈장을 추서한다고 하고, 많은 국민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단, 그때나 지금이나 근로환경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힘든 분야가 있기 마련이고, 부침이 있기도 하지만, 지금은 상식적인 상황으로 발전된 상태다.

오히려 3D 직종에 거꾸로 뛰어드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름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거다.

쉬려면 쉴 수도 있다. 건강도 챙길 수 있다. 무리한 업무는 본인이 조절해야 하고, 회사가 적절하게 분배해줘야 옳다.

그게 아니면 그만 두고 다른 직장을 알아보거나, 앞서 언급한 창업이나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것이 낫다.

 

아직도 70년대에 머물러 있거나, 오해, 곡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살짝 우려스럽다.

 

노동운동이 무색한 상황인 것이다.

오히려 생산성 향상과 글로벌 기준에 맞춰 꾸주닣 향상되어온 근로환경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전국민이 다 힘들게 일하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된다.

 

'정의연' 윤미향 사건 판사 같은 분도 근로환경이 좋지 않아 회식중 쓰러져 사망했을까? 아니라고 본다.

현대차? 생산공장에 라인이 자주 멈춘다 한다.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시청하기 때문이란다. 지금은 시정되었나 모르겠지만, 세상이 70년대의 그 세상은 이미 아니다.

 

http://cbs.kr/RGw4ec 

 

[전태일 50주기]"오빠가 분노한 노동현실, 지금도 똑같다"

■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2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전순옥 전 의원 (전태일 열사 동생) 허리를 펴고는 일어설 수도 없고 환기도 안 되는 좁은 다락방에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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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이슈 전태일 열사 50주기

[전태일 50주기]"오빠가 분노한 노동현실, 지금도 똑같다"

 

전태일, 휴일엔 동생들과 놀아주던 다정한 오빠
母 이소선, 머리카락 팔아 근로기준법 책 사다줘
오빠 쓰러지자마자 돈가방 들고 온 안기부
50년이 지났지만 노동 사각지대는 더 심각해

 

https://youtu.be/qnRdT9vMF38 

■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2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전순옥 전 의원 (전태일 열사 동생)

허리를 펴고는 일어설 수도 없고 환기도 안 되는 좁은 다락방에서 하루 18시간 미싱을 돌립니다. 손을 씻으려고 해도 씻을 공간이 없습니다. 결국 들이마신 먼지 때문에 폐병에 걸리고 쫓겨날까 봐 병을 숨기면서 그렇게 일했던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을 대신해서 노동법 준수를 외치다가 결국 분신으로 목숨을 끊은 청년이 바로 전태일 열사죠. 내일 모레 11월 13일은 전태일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꼭 50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제의 인터뷰에서는 열사의 동생이죠. 전순옥 전 의원, 스튜디오로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전순옥> 안녕하세요.

◇ 김현정> 벌써 50년 됐어요?

◆ 전순옥> 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이번에 행사를 준비하면서 벌써 50년, 반세기가 지났죠.

◇ 김현정> 오라버니가 살아 계셨으면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 거죠?

◆ 전순옥> 22살에 돌아가셨는데요. 72세.

◇ 김현정> 전태일 하면 그 앞에 수식어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이렇게 붙는데 사실 할아버지시네요.

◆ 전순옥> 그렇죠.

◇ 김현정> 그때 오빠가 첫째였고 우리 전 의원님이 셋째?

◆ 전순옥> 제가 셋째.

◇ 김현정>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셨어요?

◆ 전순옥> 나이 차이가 6살.



◇ 김현정> 6살 차이. 그러면 그때 전태일 열사는, 오빠는 미싱 일을 하셨고.

◆ 전순옥> 처음에는 미싱 일을 했고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시다들, 어린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재단사가 돼야지 공장의 책임을 맡게 되거든요. 책임을 맡으면 어린 시다들을 많이 도와줄 수 있는 거라서 재단사로 다시 또 재단을 배웠죠.

◇ 김현정> 전순옥 전 의원은 그때 같이 일하셨잖아요. 같이 미싱하신 거예요?

◆ 전순옥> 저는 보조일, 그러니까 미싱. 자꾸 일본말을 쓰게 되는데 그게 알아듣기 쉬운 거니까.

◇ 김현정> 미싱의 꿈이라는 노래도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미싱, 미싱 예전에는 그랬으니까.

◆ 전순옥> 그래서 보조 일을 했죠. 시다 일을.

◇ 김현정> 시다 일, 이것도 일본말입니다마는 그 당시 그때를 떠올리면 우리가 확 와 닿는 어떤 수준의 환경에서 어떤 수준의 대우를 받으면서 일했겠구나를 떠올리려면 그 용어가 사실 적합해서 쓰는 겁니다. 양해를 부탁드리고요. 시다라고 하는 미싱 보조일을 한 거예요. 오빠를 떠올리면, 그리고 그 시절을 떠올리면 항상 떠오르는 장면 같은 거 혹시 일화 같은 거 있습니까?

◆ 전순옥> 항상 오빠하면 떠오르는 것은 일을 할 때는 공장에서 오빠랑 같이 일을 하면서 공장에서 항상 시다들 어린 소녀들을 돌보기 위해서 관심 가지는 거, 그리고 집에서는 어쩌다가 일요일날 한 달에 한 번 쉬어요. 그러면 동네 분들이 아버지 친구, 어머니 친구, 제 친구들 다 동네로 와요. 오빠 친구까지 저희 집으로 와요. 그러면 오빠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자기가 읽었던 책, 봤던 영화 얘기, 그러면서 결국에는 평화시장이라는 곳은 이런 곳에서 내가 일을 하고 있어, 그렇게 이야기를 아주 열변을 토해서. 그런데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슬픈 내용이지만 너무 재미있게 하니까 다들 그 얘기를 들으러.

◇ 김현정> 와요?

◆ 전순옥> 몰려 와요. 그때는 TV도 없는 때였거든요. 또 항상 동생들에게 너무 많은 추억을 만들어줬어요, 오빠 하면.

◇ 김현정> 아니, 그 어려운 와중에도 또 추억을, 어떤 거 기억나세요?

◆ 전순옥> 오빠가 노는 날이면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시에 있는 많은 유원지를 데리고 다녔어요. 초등학교 다니면서도. 어린 우리들을 데리고. 그래서 서울시내에 있는 한강이나 뚝섬이나 자문밖이나 이런 데 물이 얼마나 깨끗했는지 저희는 그 물을 그냥 마실 정도로.

◇ 김현정> 한강물 그냥 퍼마시던 그 시절이에요, 여러분.

◆ 전순옥> 그런 곳을 많이 데리고 다녔고. 항상 저희들을 돌봐주는 오빠, 그러면서도 엄격하게 또 공부를 가르치는 오빠.

◇ 김현정> 공부도 가르치고. 배워야 된다 너희들.

◆ 전순옥> 그렇죠.

◇ 김현정> 그 오빠가 노동법을 혼자 독학하고 있다는 건 아셨어요?

◆ 전순옥> 독학하고 있다라는 것을 저는 몰랐고요. 우리 다 몰랐는데 어느 날 같이 밥을 아침에 먹으면서 저희 아버지가 오빠 얘기를 들으면서 ‘근로기준법이라는 책이 있다. 하지만 너는 그 책을 보려고 생각은 하지 마라.’

평화시장에서 미싱사로 일하던 당시 전태일 열사의 모습. (사진=전태일 재단)



◇ 김현정> 아버님이, 왜 그러셨을까요?

◆ 전순옥> ‘그 책을 보기 시작하면 네 인생이 너무 힘들어지고 아버지도 한때는 관심을 가졌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런 책이 있다.’ 그렇게 얘기를 하니까 오빠가 가만히 있었어요. 그러더니 나중에 어머니한테 ‘엄마, 내가 지금 당장 그 책을 사야 되는데 월급 때가 아직 안 돼서 돈이 없으니까. 엄마, 돈을 얼마만 좀 구해 주세요.’ 그렇게 한 거예요. 그랬는데 어머니가 돈을 구해 줬어요. 어떻게 구해 줬느냐. 어머니 머리가 기셨어요.

◇ 김현정> 이소선 여사.

◆ 전순옥> 머리를 잘라서. 그래서 그 머리를 팔아가지고 100 몇 십 원인가 한 200원 안 되는 돈을 오빠한테 줘서, 청계천에 대학천 시장 있죠? 오빠가 헌책방에 가서 그 책을 샀어요.

◇ 김현정> 헌책방 가서.

◆ 전순옥> 그런데 나중에 엄마가 후회를 하시는 게 ‘내가 머리 잘라 주지 않았으면 그 책을 안 봤을 거고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그런 후회를 하신 적도 있었고요. 엄마는 그러면서도 거기에 대해 잘 말씀을 안 하셨고, 어쨌든 제가 알게 된 것은 우연히 방을 청소하다가 앉은 책상에 있는 일기를 읽다가.

◇ 김현정> 오빠 일기 보셨어요?

◆ 전순옥> 네. 우연히.

◇ 김현정>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 전순옥> 거기에 보니까 평화시장의 현황에 대해서 다 써 놓은 거예요. 하루에 몇 시간씩 일을 하고 있고 얘네들이 어떻게 폐병이 들어서 쓰러져가고. 제가 그걸 보고 막 울었어요.

◇ 김현정> 일기를 보고.

◆ 전순옥> 그리고 저도 일을 했으니까 알게 됐고. 그래서 오빠가 이런 일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자기 시간을 쏟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됐죠.

◇ 김현정> 아니, 그렇게 어렵게 일하고 쉬는 날도 없는데 또 그걸 쪼개서 공부를 한 거예요.

◆ 전순옥> 네, 오빠는 항상 공부했어요.

◇ 김현정> 노동법, 또 한문으로 돼 있잖아요. 한자를 독학해서 공부했다고 제가 들었어요.

◆ 전순옥> 한문책을 또 헌 거를 사서 한자를 찾아가면서 근로기준법 책을 전부 다 독해를 하고. 그래도 안 되는 건 동네에 대학을 중퇴하신 아저씨가 한 분 있었어요. 그분도 봉제 공장을 하고 있었어요. 이강식 아저씨라고 있었는데 그 아저씨한테 찾아가서 또 물어보고.

◇ 김현정> 그렇게 해서 이제 알았습니다. 노동법에 대해.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정부 부처에 가서 물어보는데 잡상인 취급하면서 내쫓아요. 아무도 이 노동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지 않습니다. 결국 택한 것이 스스로를 불살라서 세상에 이 사실을 알려야 되겠다. 내가 죽으면 세상이 나를 쳐다봐주지 않겠는가. 내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겠는가, 하고 택한 것이 분신이었는데. 그날 오빠가 돌아가신 11월 13일에 안기부에서 찾아왔다면서요?

◆ 전순옥> 그날은 아니고 다음 날. 그날은 제가 마지막 병원에 갔을 때 이미 10시 한 반 정도 돼서 오빠는 영안실로 옮겨졌고 어머니는 다녀가셔서 집으로 가셨고. 그래서 내일 아침에 다 병원으로 온다고 그랬는데 그다음 날 안기부에서 왔죠.

◇ 김현정> 뭐라고?

◆ 전순옥> 안기부에서 와서 그 사람들은 제일 관심은 ‘빨리 장례식 하자.’

◇ 김현정> 빨리 장례식 치러버리자?

◆ 전순옥> 어머니한테 ‘빨리 장례식을 해야 된다. 그리고 남은 자식들 데리고 살아야 되는 거 아니냐.’ 걱정을 해 주는 것처럼 막 그렇게 했어요. 그러고 나서 낮 정도 되니까 그날인지 그 다음 날인지 그 날짜는 기억 안 나는데 돈이 가득 들어 있는 큰 가방을 들고 와서 어머니한테 ‘자식들하고 살아야 되니 빨리 장례식을 치르고.’

◇ 김현정> 이 돈으로 살라고?

◆ 전순옥> ‘새로운 삶을 시작하셔야 되지 않느냐.’

◇ 김현정> 얼마쯤 됐어요? 그 가방 안에 가득 들어있는 현찰이.

◆ 전순옥> 만 원짜리가 가득 들어 있었는데 사람들의 얘기로 한 3000만원은 되겠다.



◇ 김현정> 그 시절에, 70년대에?

◆ 전순옥> 그래서 저희 어머니가 저하고 작은오빠, 막내를 데리고 나가서 물어봤어요. ‘이 돈을 받아야 되느냐, 안 받아야 되느냐.’ 그래서 제가 ‘받으면 어떻게 되고 안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어봤더니, 어머니가 ‘받게 되면 오빠는 빨리 장례식을 치르고 오빠가 원하는 뜻을 우리가 포기해야 된다. 그렇지만 너희는 대학도 갈 수 뭐도 할 수 있고 공장 일 안 해도 되고.’ 그래서 그렇게 얘기를 해서. 저는 일기장을 읽은 기억이 있어서 ‘엄마, 저는 계속 공장 다녀도 괜찮아요. 엄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했더니, ‘나는 다 결정했다. 안 받기로.’

◇ 김현정> 안 받겠다.

◆ 전순옥> 그래서 그럼 나도 엄마의 뜻을 따라서 우리는 안 받고 일하겠습니다, 그렇게 얘기했어요.

 



◇ 김현정> 그 어마어마한 돈, 지금도 큰돈인데 그 시절에 그 돈이면 진짜 엄청난 돈 아닙니까? 우리는 안 받겠다, 그냥 공장 다니겠다, 그러고 나서 가족들의 삶도 바뀌었어요. 전순옥 전 의원은 잘 아시지만 노동운동을 하다가 35살에 유학을 가서 노동문제로 박사까지 따고 돌아와서 국회에서 일도 하고. 지금도 노동운동을 하고 계시고. 어머니 이소선 여사도 진짜 노동운동의 나머지 일생을 다 바치신 거죠?

◆ 전순옥> 그렇죠. 저희 어머니는 오빠 병실을 나오면서 오빠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겠다라는 스스로의 결심을 하시고 40년 동안 사람들 앞에서 눈물 한 번 안 흘리셨어요. 그게 어머니한테는 병이 된 거죠, 사실.

◇ 김현정> 아니, 아들 생각하면. 저는 아는 얘기인데도 다시 들으면 눈물 나거든요. 어떻게 어머니가 안 우실 수가 있습니까?

◆ 전순옥> 눈물을 안 보이겠다고 스스로 결심을 하고 나와서 눈물이 나면 몰래 혼자 나가서 우시고 화장실에 가서 우시고 그러면서 그 강인함과 아들의 뜻을 꼭 내가 이루겠다고 3번이나 약속한 그 약속을 내가 지키겠다. 그러면서 40년을 거리에서, 투쟁 현장에서, 그리고 경찰서 유치장에서, 또 감옥에서. 경찰서에 390번을 잡혀가셨대요.

◇ 김현정>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대단한 어머니 밑에 대단한 아들이었다, 이런 생각이 드는데 어머님이 2011년에 돌아가셨던가요?

◆ 전순옥> 2011년 9월에.

◇ 김현정> 무슨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 전순옥> 저희 어머니 고혈압이나 당뇨는 있었는데 그날까지도 한진, 울산에서 한진 노동자들이 올라와서 점심도 같이 드시고 다 했어요. 뜨거운 날이었는데. 그런데 저녁에 한 10시쯤 다 돼서 갑자기 쓰러지셔서 심근경색으로.

◇ 김현정> 갑자기 돌아가셔서 더 안타까우신.

◆ 전순옥> 병원에서 49일 딱 계시다가.

지난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전태일다리(버들다리)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 50주기 버들다리 축제에서 전태일 재단 이수호 이사장(오른쪽)과 서울봉제인지회 이정기 지회장이 전태일 동상에 목도리를 걸어주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김현정> 그렇습니다. 가족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얼마나 나아졌는가, 지금을 생각해 봐야 되는데 이런 노력들이 바탕이 돼서 많이 바뀌었어요. 많이 좋아졌습니다마는 여전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그런 곳들도 있을 겁니다. 어디를 주목해야 합니까?

◆ 전순옥> 저는 우리가 주목하고 관심 가져야 될 곳은 아직까지도 70년대 그 당시와 똑같은 노동 현장이 존재하고 있다.

◇ 김현정> 어디가 그래요?

◆ 전순옥> 비정규직 그리고 협력단체에서 원하청 관계에서 하청공장에서 일하는 사람, 그리고 비조직화 된 노동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어떠한 근로기준법에도 보호를 받지 못하고. 그러다가 김용균 노동자도 발전소에서 일하다가 혼자 죽었죠. 구의역에서도 가방에 라면 하나 들고 다니다가 그것도 못 먹고 거기서 죽었죠. 요즘에 또 우리나라가 비대면 시대로 바뀌면서 배달하시는 분들, 택배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고. 지금도 일일 7명씩 산재 노동자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 김현정> 다양한 형태의 어떤 노동 현장, 시스템들이 생기면서 우리가 못 보는 사각지대들이 분명히 존재하는.

 



◆ 전순옥> 사각지대가 더 심각합니다, 지금.

◇ 김현정> 그곳은 여전히 70년대다.

◆ 전순옥> 네.

◇ 김현정> 여러분, 50주기. 전태일 열사의 뜻을 기리면서 우리가 지금 돌봐야 할 곳들은 어딘지 되새기는 한 주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전순옥 박사님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 전순옥> 감사합니다.

◇ 김현정> 대단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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